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 하늘이 참 파랗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왜 저리 파랄까? 현상에 대한 인식이었다. 너 댓살때, 집 툇마루 끝에서 여름 장마비를 본 적이 있다. 쉬지 않고 내리는 그 빗물이 무척 신비스러웠다.
땅바닥에 생긴 동그란 거품이 흐르다 사라지곤 했다.
참 허무했다. 존재의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 어느 햇볕 쬐던 날, 마당에서 엄마는 빨랫줄에 명태를 걸어 말리고 있었다.
무료해 하는 어린 꼬마인 나에게 어머니는 명태 눈깔을 하나 빼 주셨다. 하루종일 일하는 어머니와 하루종일 할 일 없이 노는 나는 집 마당에서의 유일한 동료였다. 그러다 우연히 ‘나’를 바라다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무얼까?
그리고 엄마를 다시 돌아다 보았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어디서 나와서 나에게 잘 해줄까? 관계의 인식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살게 되었다. 많은 것들이 나를 제약하고 한정시키며 지나갔다.
나는 이 세상에 의해 꺾여지고 잘라지며 ‘모양’을 잡아갔다. 세상의 교육은 나같이 순한 양을 가끔은 날카로운 이리처럼 날이 서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절대 내안의 ‘어떤 것’에 대해 물어 보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스스로를 변론하고 때론 스스로를 위장하며 세상살이에 스며드는 법까지 배울 즈음, 가슴속이 메스커울 정도로 ‘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허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 그 빈 마음속 공간을 채워 줄 것이 있다고 믿기엔 내 가슴속은 벌써 어느정도 멍들어 있었다.
옛날에 좋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많았었다. 기억에 남는 명 장면들도 많았고, 기억속에서 없어지지 않을 테마들도 많았다. 그 중에 ‘마음의 행로’라는 흑백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차 대전인지 2차 대전인지 모르겠지만 전쟁 후유증으로 기억을 상실한 장교가 정신병동을 나와서 생긴 일이다.
한 여자와의 만남, 가난하지만 행복하고 순수했던 그 여자와의 생활, 그리고 문학 지망색으로서의 희망어린 행로가 이어진다. 하지만 또 다른 교통사고로 옛 기억의 회복, 현 기억의 상실이 드라마를 드라마답게 만든다. 옛날 기억의 회복으로 재벌 2세의 자리를 차지하여 상류사회 인사가 되나, 잃어버린 그동안의 시간은 찾을 수가 없는 수수께기가 되어 버린다. 교통사고때 입고 있었던 서민복장은 그에게 무척 생소한 것이었고, 그나마 그 옷의 주머니안에 있는 열쇠 하나가 유일한 기억찾기의 단서가 된다.
마지막 장면은 참 극적이다. 어느 시골마을을 찾아 들어가 작고 아름다운 집 문을 그 열쇠로 열었을 때, 이제까지 자기를 도와준 비서출신의 자기 아내가 바로 잃어버린 기억의 그 여인이었음을 안다. 아내의 본래 이름을 부를때 현재의 아내는 과거의 연인으로 돌아가 행복한 포옹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구성에 극적 효과와 로맨틱한 테마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돌아온 기억과 함께 되찾은 사랑까지의 긴 여로, 그리고 여주인공의 순정어린 기다림과 인내등이 콧등을 시리게 한다.
나도 오래전부터 주머니에 열쇠가 하나 있었다. 이 열쇠에 대한 나의 인식은 내가 나를 잃어가면서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벌써 20대 때부터 인 것 같다.
사회화 되고 많은 ‘친구’들을 갖게 되면서 가슴 한쪽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일부분을 잃은듯한 허전함, 이름할 수 없는 갈증, 현 세상과는 다름 가치가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나를 누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삶은 지속되었고, 열정과 생존이 엉켜진 ‘최선’이라는 마차는 꾸준히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의 내부에서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어떻게 부인하겠는가? 가끔 내 마음속의 ‘열쇠’를 만지작거리게 됨을 어찌 막으랴?
또 하나는 귀소본능이다. 고향 그리는 마음이야 비슷하다 해도, 내 안의 그 어떤 존재도 어디로 돌아가고 싶어함을 느끼는 것이 착각만은 아닐듯 하다. 어린 시절의 파란 하늘을 기억하듯, 아니 그 파란 하늘을 쳐다보던 나의 존재를 기억하듯 내 영혼은 그 어딘가를 그리워 한다.
혹시, 내 마음속의 열쇠가 내 영혼의 고향을 가는 유일한 단서가 아닐까? 이 열쇠를 어떻게 사용하면 될까? 어느 곳의 문을 여는 열쇠일까? 왜 나는 이것을 고향이라고 말할까? 과연 그곳에서 오기는 온 것인가?
세상풍습에 많이 적응하다 보니 보는 눈높이까지 정해져 있음을 느낀다. 세상이란 참 무섭다. 지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로 나눠서도 생각해 봤다. 겉보기 잣대와 속보기 잣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는 자와 관리하는 자가 구분되어 있다는 인식도 들어오게 되었다. 어느날 ‘세상권세’라는 성경용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렴풋이 느껴진 영적 본능들이 찾아낸 이론들이 성경내용들과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렇지 하면서 고향 찾아가는 여정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내 육신의 고향인 광주와 무등산을 찾아가는 재미보다 훨씬 짜릿함을 느낀다.
어느날 마지막으로 내 주머니에 있던 이름모를 열쇠를 열고 들어가는 문이 어디일지 모르나, 그곳이 하늘문 천국문이면 참 좋겠다. 그 소망이면 나는 현재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 고향은 이렇게 좋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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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무 치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