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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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변신 그리고 후유증

2020-01-16 (목) 문영애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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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시시한 꿈을 잘 꾼다. 화장실을 못 찾아 헤매거나, 찾았는데 줄을 길게 늘어서 있어 들어갈 수 없다거나, 겨우 들어갔는데 변기 주위가 온통 황금으로 뒤덮여있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개꿈을. 실내화를 신고 다녔던 여학교의 변소도 늘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있고, 제주도에서 돼지가 반기는 뒷간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가 미국에 오고 나서 한국엔 화장실이라는 고상한 단어와 함께 편리한 공중화장실이 생겼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변소라는 나의 말에 젊은 친구들이 마치 고약한 냄새라도 감지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곤 해서 그 단어를 고치느라 애를 먹었다.

화장실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화장실 수준이야말로 각 나라의 경제 수준과 비례하기 때문에 글로벌한 시대에 부응해 나라마다 그 품격을 갖추느라 애를 쓰고 있다.
2년 전에 인도를 방문했었다. 아그라(Agra)역에서 잔시(Jhasi)로 가기 위해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기차 안의 화장실보다는 대합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소변을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화장실 문을 여니 “에구머니나!” 재래식 변기 바로 옆에 큰 것 한 무더기가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어렸을 때 집에 도둑이 들어와 담 옆에 싸 놓고 간 것 같이 크다. 옛날엔 간 큰 도둑은 물건도 훔쳐 가고 이렇게 황금 선물도 주고 가야 안 잡힌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에 태연히 일을 보고 여유 작작 사라지곤 했다. 얼른 문을 닫고 내가 또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인구가 많고 화장실이 부족한 인도에서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시에서도 길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대소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런데 반가운 기사를 보았다. ‘클린 인디아’ 캠페인을 벌여 화장실 사용 교육과 계몽에 힘쓴다 한다. 캠페인까지 벌여야하는 이유는 대다수의 농촌 사람들은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시원하게 들판에서 용변을 보기 때문이다. 인도 가정이 갖고 싶은 물건은 TV, 압력밥솥, 모터사이클 순으로 화장실은 12위인 것을 보아도 별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또 최근에 인도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집에 제대로 작동하는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는 자격 조건을 내세워 “가난한 후보는 출마도 못 하느냐”고 반발을 샀다. 배수로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가짜 화장실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너무 웃기는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법까지 만든 것을 보면 인도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는 일로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은 짧은 북경 여행밖에 못 해 보았지만 친구에게서 중국의 시골에 칸막이만 있고 문이 없는, 혹은 완전히 오픈된 민망한 공중화장실에 대해 들었다. 어느 쪽으로 앉아서 볼일을 보아야 할지, 눈은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재래식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면서 서로 인사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한 단다. 부끄럽기는커녕 너무 자연스러운 공간으로 사용한다는 얘기이다. 아마 한국의 공중목욕탕이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러한 장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남에게 발가벗은 자신의 몸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얼굴을 찡그리지만, 우리에겐 몸을 씻는 편안한 장소인 것처럼 누구든 자기들의 문화에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법 아니겠는가.
그러한 중국이 ‘화장실 혁명’이라는 공중화장실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유명관광지에 화장실 1만 7천 개를 신축하고, 낡은 8천 개를 리모델링할 계획이란다. 또 베이징에선 일명 ‘제5 공간’으로 불리는 최첨단 화장실 100개를 시범 설치한다고 한다.

완공된 화장실을 사진으로 보니 무료 와이파이, 현금인출기, 세금납부기와 일인용 TV도 붙어있다. 남자들이 소변을 보는 그 짧은 시간을 배려해 앞면에 개인용 TV 스크린까지 걸려있는 건 너무 넘치는 변신이 아닐까?
좀 격이 다른 문제이지만 미국도 오바마 정부 때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맞고소를 하며 ‘화장실 전쟁’이 있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배설문제가 성전환 학생들에겐 남/여로만 구분 되어있는 학교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은 고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태어난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이 아닌, 내가 택한 성 정체성에 맞게 제발 오줌만이라도 마음 편히 눌 수 없느냐고 ‘Pee in Peace’를 외쳤기 때문이다. 화장실 표지를 ‘성 중립’(Gender Neutral or Unisex)으로 부치자는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며 불행하게도 이 법은 폐기되고 예전처럼 태어난 성에 따라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여행해 보면 각 나라의 화장실이 나에게는 제일 먼저 적응해야 하는 과제이다. 아직도 개발도상국에 있는 그곳은 문화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각 나라의 화장실 문화를 이해하면 그곳의 문화도, 그 사회의 단면도 쉽게 이해되기도 한다. 나는 여행을 마치고 워싱턴 공항에 도착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스테인리스 도어가 죽 늘어선 화장실을 보는 순간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진정되곤 한다.
공동화장실은 가장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장소이다. 남을 배려하는 최선의 예절을 갖추어야만 내게도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문영애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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