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바다] 내상의 무게
2020-01-06 (월)
SF한문협 회원 김소형
"내상이 있다." 하얀 가운을 입고 곱슬 머리에 둥근테 안경을 쓴 한 젊은 의사가 그녀를 향해 그리 말했다. 떠나온 날로부터 얼마만에 다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그곳을 찾았다. 짧은 방문기간 동안이지만 왔을때 꼭 들러 몸을 챙겨야 한다고 미리 예약을 잡아 놓았다고 두손을 잡아 이끈 혈육 덕분에 혼자서는 찾지 않을 그곳을 말이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오래간만에 맡는 약재 냄새가 코 끝에 와 닿았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몸이 좋아질 것만 같은 약재의 향은 오래된 기억에서 익숙함으로 금세 제자리를 찾고선 온 몸을 반기듯 감싸 안는다. 그녀는 몸이 약했던 딸을 위해 해마다 한의원에 들러 약을 지어주시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오래간만에 찾은 고국에는 새로 선 빌딩들과 고속화도로가 세월이 지나고 있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모든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녀는 새로운 진단을 받고 있었다. 흰가운을 입은 의사는 약재향이 나는 공간에서 그녀를 진단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내상을 입힌 상대도 똑같이 내상이 있을 것입니다."
약재향이 나는 긴 복도를 지나 나오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입은 내상은 스스로 알 것도 같았다. 때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때론 스스로 합리화한 이유들로. 그러면 또한 그녀가 가지고 있는만큼 누군가가 입었을 내상들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내상의 무게' 를 생각했다. 그 만큼의 무게가 누군가의 가슴속에도 있음을.
그곳에 머무르는 짧은 기간 동안 그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친지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일하느라 어릴적 아이들을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아이들을 키우고자 오랜 세월 하던 일을 멈추고 초보엄마라는 직업으로 돌아와 처음 만났던 아이들 친구의 엄마들, 그녀들과 동맹하여 추진하던 품앗이. 그녀들은 돌아가며 하나같이 자신의 집을 아지트로 내어주며 학원에 가는대신 그림속에 숨은 수학이야기, 미술과 세계사, 철학과 영어 수업 등을 함께 했었다. 수업은 잠시였고, 아이들은 수업 후 군고구마와 주먹밥 등 각종 간식을 먹고 다시 마을 놀이터와 개천, 운동장에 나가 뛰어 놀았다. 여름이면 거실 가득 땀에 범벅이된 아이들의 발냄세로 코를 찌르던 그 시절. 아이들은 마을에 하나있던 서원에도 함께 가고, 말썽을 부려 그 벌로 개천에서 휴지줍기도 함께했다. 떠나오며 잊혀진 줄 알았던 추억들을 어제 일처럼 떠올리며 그녀안의 내상은 스물스물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녀들이 이야기한다. ”그 시절, 어렸던 아이들이 너무나 그리워요. 그래도 그 때 우리 참 행복했어요.지금 이 시간도 또 세월이 지나면 그리워 지겠지요?”
며칠 후 그녀는 다시 약재향이 나는 곳을 찾았다. 곱슬머리의 젊은 의사는 그녀의 몸에 침을 놓아주고 기침과 감기증세에 대해 3일분의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을 받아들고 다시 약재향이 나는 긴 복도를 지났다. 며칠전 보다 향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폐 깊숙히 전해지는 약재 향은 가슴켠에 들어와 내상의 언저리를 가늠하는 듯 했다. 떠나온 후 처음으로 그리웠던 친구와 친지들을 다시 만나며 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가슴 속에 얼룩졌던 내상은 조금씩 사랑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 전에 미쳐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그녀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난 내상의 흔적들.
그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춘기 시절,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으로 삶의 터전을 바꿔야 했던 아이들. 떠나온 후 처음으로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난 후 아이들은 그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아이들에게도 그녀가 채워주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 세대만의 영역이 있을텐데 그녀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해 주지 못하고 스스로 내상을 입고 아이들에게도 내상을 입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해와 사랑으로 치유해야만 한다. 때론 그녀 가슴속에 직접적인 내상이 아니었음에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상은 그녀에게 그 만큼의 무게로 드리워지고 있었음을. 그녀는 다시금 내상의 무게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더이상 그 이름들에 붙들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붙들어 놓은 내상이라 이름 붙인 허상일 수도 있다. 만일 그것이 허상이라면 저울에 가볍게 달아 날려보내리라.’
그녀는 처방받는 감기약 한봉지를 꺼내먹고 비행기 탑승구로 향했다. 감기는 나을 것이고, 비행기는 그녀가 왔던 곳으로 다시 그녀를 안내할 것이다. 같은 종착력의 또 다른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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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한문협 회원 김소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