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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뚫은 동백아, 다산처럼 치열하게 피었구나

2020-01-03 (금) 글·사진(강진)=우현석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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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강진
동백숲 속에 자리한 다산의 초당, 철 이른 동백꽃 200년전처럼 반겨

▶ 벼슬길 떠나 유배길 오른 정약용, 고적한 초당 툇마루에 걸터 앉아 속세 잊으려는 듯 치열하게 집필…암흑기 딛고 오히려 꽃망울 활짝

겨울 뚫은 동백아, 다산처럼 치열하게 피었구나

정약용은 18년의 강진 유배 기간 중 마지막 10년을 바로 이곳 다산초당에서 기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500권의 책을 집필했다.

겨울 뚫은 동백아, 다산처럼 치열하게 피었구나

다산초당 인근 동백숲은 해를 가릴 정도로 조밀했고 철 이른 동백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산하를 섭렵하다 보면 곳곳에 깃든 위인들의 삶에 경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20만명의 왜군을 단신으로 막아내다시피 한 이순신 장군이 그렇고, 국정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쇄신한 것도 모자라 인류의 최고 자산이라고 해도 모자랄 게 없는 한글까지 창제한 세종대왕도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로 넘어와서는 다산 정약용이라는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나 문화와 사상·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커다란 진전을 이뤄냈다.

정약용의 업적은 그가 유배지인 강진의 초당에서 500권에 이르는 저서를 집필했다는 점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얼마 전 그가 인간의 능력이 닿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집필했던 강진의 다산초당을 다녀왔다. 동백숲 속에 자리한 초당은 검푸른 잎새로 뒤덮여 반짝이고 있었다. 다산초당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200년 전 고적함 속에서 집필에 몰두했을 그를 생각하다 돌아왔다.


정약용의 삶은 간단없이 치열했다.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천자문을 뗐고 열 살에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이라는 시집을 펴낼 정도로 총명했다. 삼미집이라는 책 제목은 그가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으로 눈썹이 셋으로 나누어진 데서 따온 것이다.

열다섯 살에 풍산 홍씨와 혼인한 다산은 스물둘에 초시에 급제했으며 성균관 유생 시절 정조의 눈에 들며 두각을 나타냈다. 28세에는 대과에 차석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다.

그런 그의 인생 변곡점은 1784년, 이벽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관련 책자를 본 후부터 시작된다. 그가 가톨릭 교인이라는 것과 관련해서는 이론이 있으나 남인 공서파의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10일 만에 풀려나와 1792년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수원성 축조에 일익을 담당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일대를 사찰했으나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으면서 주문모 신부 사건에 둘째 형과 함께 연루돼 좌천됐다가 규장각의 부사직을 맡고 1797년 승지에 올랐다.

다산은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로 장기(포항의 옛 지명)에 유배됐고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돼 마침내 강진으로 유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개인적인 암흑기였을 강진 유배는 조선 시대 후기의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산은 이곳에서 지방 수령의 폭정을 질책하고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적시한 목민심서, 홍역 치료에 관한 의학서적인 마과회통을 비롯해 천자문을 명사·동사·형용사 등 품사별로 분류해 어린이 학습에 최적화한 아학편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치열한 집필을 이어갔다.

글로 먹고사는 기자는 백련사를 출발해 다산이 칩거하며 집필을 이어가던 다산초당(사적 107호)으로 향했다.


초당으로 가는 내내 동백숲은 해를 가릴 정도로 조밀했고 철 이른 동백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다산이 18년의 유배 기간 중 마지막 10년을 기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500권의 책을 집필했던 초당은 이름처럼 초가였으나 1936년 노후로 붕괴한 것을 중수하며 기와로 다시 지어졌다.

초당 근처에는 정약용이 직접 바위에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음각과 물을 길어 차를 끓여 마셨다는 약천, 다산이 직접 돌을 날라 만들었다는 연못 안에 작은 산이 있는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남아 있다.

다산이 강진에 귀양을 와 처음 머무른 곳은 ‘사의재’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 기거하면서 공부를 했고 이후 고성사의 보은산방과 목리의 이학래 집을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했다.

정약용이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강진으로 유배를 온 지 18년 만인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다산은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하지만 그 토대가 닦여진 곳은 검푸른 동백숲,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었다.

<글·사진(강진)=우현석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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