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너무도 정직한 우리나라 사계절

2019-12-09 (월) 이재진 국제개발금융 투자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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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유럽생활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내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왜 돌아왔느냐”는 것이었다. 런던같이 자유분방하고 문화적으로 부유한 코스모폴리탄 도시를 떠나 왜 굳이 기회도 제한적이고 갑갑한 한국 같은 나라로 돌아왔느냐는 것이다.

나의 명쾌한 대답은 하나였다. “날씨 때문”이라고. 대부분 믿기지 않는 듯, 뭔가 다른 이유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난 그 외에 더 거창하고 명확한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교과서에 대한민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고 명시 되어있는 문구를 기억할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사계절이 없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 있으며 또 하루에 사계절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살면서 나는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다 갑자기 거센 태풍으로 바뀌고 비바람이 치는 날씨를 하루에 겪어 본 적이 있고 미국 미시건에서는 5월 초까지 눈이 내리는 봄을 맞아 보았다. 런던에서는 구름 낀 회색 하늘 아래에서 일년의 반 이상을 보냈고 하루의 반나절 이상이 회색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시꺼먼 암흑 같은 겨울을 7번이나 지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한국은 사계절이 정말로 뚜렷하다. 열대야로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는 듯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달력을 보면 9월 초이고, 나무가 울긋불긋 해지고 은행 알이 발 밑에 밟혀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10월 말, 또 어느새 귀가 시려 코트 깃을 세워 올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기 시작할 만큼 싸늘한 바람이 불면 겨울의 시작이다. 일출이 앞당겨져 날이 길어진다 싶으면 벌써 새싹이 돋는 봄이고 싱그러운 이파리들이 여기저기서 돋아나기 시작한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른 옷의 두께는 물론이고 계절에 맞는 색깔까지 있다는 것이다. 햇살이 강한 봄에 갈색 스웨터를 입으면 칙칙해 보인다고 하고 또 운치 있는 가을에 노란색을 입는 것은 뭔가 어색하고 촌스러워 보인다는 무언의 공식이 존재한다.

심지어 여자들이 자주 찾는 네일샵에서도 우리나라만큼 계절의 영향을 받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외국여자들이 일년 내내 손톱에 버건디 계 붉은색을 고집한다면 우리나라는 봄여름에는 산뜻한 파스텔 계열, 가을에는 누드 또는 붉은 계열로 하고 겨울에는 강한 네이비나 반짝이를 하곤 한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계절에 안 어울린다거나 추워 보인다는 등 네일 아티스트 언니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할 정도니 말이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겨울아침 출근길이지만 사무실로 걸어가며 보이는 높고 청명한 파아란 하늘, 그 아래의 광화문 광장과 세종대왕 동상, 그 뒤로는 청록색 기와가 예쁘게 자리하고 있는 청와대와 뒤 배경을 이루는 그림 같은 인왕산이 멋지다.

그러나 그보다 가까이에는 세월호사건 시위 천막이 있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의 피켓을 들고 있는 데모단이 있고, 목청이 떠나가라 뭔가를 외치는 마이크 소리가 한 가득이다.

2018년 다시 돌아온 후의 대한민국은 뭔지 모르게 뒤숭숭하다. 날이 갈수록 정치적 양극화가 심하게 느껴진다. 견해와 이념이 달라 생기는 현상을 어쩔 수 없겠지만,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현재의 정치적 구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견해와 이념을 뒤로 하고 모두가 우리나라 계절만큼만 정직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정직함이 양극화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을 가져보았다.

<이재진 국제개발금융 투자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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