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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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바다] 눈물 없는 애도

2019-11-25 (월)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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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말 이맘때 즈음 나는 멕시코에서 망자의 날을 기념했다. 망자의 날은 조금 웃기다. 사후 세계 죽음의 여신 믹테카시우아틀 (Mictecacihuatl)에게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엄숙한 전통에서 비롯된 날인데 내가 경험한 축제는 조금의 차분함도 찾아볼 수 없는 파티 그 자체였다. 거리에는 각양 색색의 화려한 의상과 소품들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죄다 해골 분장을 하고 시끄러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누볐다. “죽음” 하면 떠오르는 검은색과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안타깝게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1년에 한 번씩 가족들과 친구들을 보러 세상에 내려온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축제라기에 대외적으로만 이렇게 시끌벅적하고 가족들끼리는 조용한 애도가 중심이 될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심지어 ‘오프렌다 (Ofrenda) 라고 부르는 제단 바로 앞에서도 빠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축배를 드는 것이었다. 제대로 못 놀아서 죽은 사람들만 독기 품고 내려오기라도 하나 싶을 정도로 즐기는 모습에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이렇게나 가볍다니, 생소함을 넘어서 경박하게까지 느껴졌던 것 같다. 내가 처음 경험한 멕시코 사람들은 흥과 정이 넘쳤다. 병원까지 기어갈 힘조차 없이 아플지라도 의사의 진단서가 없으면 예외 없이 빵점 받는 것은 미국 대학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런 팍팍한 원칙주의 나라에서 오래 생활해온 나는 “저 이번 주에 가족들이랑 놀러 가요!” 한 마디면 시험도 연장되는 멕시코에서 숨통이 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정서가 때때로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번은 학생들이 데모를 빌미 삼아 수업에 참석하지 않자 일주일이 넘도록 수업이 취소된 적도 있었다. 말로만 데모하고 뒤에서 뺀질거리며 노는 친구들도 수없이 봤기에 말이 좋아 흥이고 정이지 이래서 나라가 발전이 없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당시 어떤 어른이 이런 말을 해줬다. “멕시코는 오랜 시간 침략을 받아서 노예근성이 자리잡혀 있어요. 과거도 미래도 없으니까 그냥 지금 현재를 즐기는 거죠.” 나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라고 대답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존중과 연민 뒤에 냄새나는 멸시와 우월감도 검게 타고 있었다. 나는 잊혀지기를 강요받았던 과거를 되찾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노력했던 대한민국의 민족성을 받았고 진취적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미국인들과 함께 교육받았으니까.

일 년이 지난 2019년 11월 초, 나는 생애 처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했다. 항상 친절과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셨던 따듯하고 감사한 분이었다. 안타깝고 보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울보라 지금까지 울지 않고 보았던 영화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막상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게 죽음은 보이지도 않는 저 머나먼 하늘에 떠 있던 풍선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 풍선이 확 다가와 내 눈앞 시야를 가리더니 뻥 터져버렸다. 그 풍선이 어떤 색깔, 크기, 형태였는지 알 수 없었고 그 경험은 눈물 몇 방울로 설명이 되지 않는 나만의 것이었다. 내 풍선의 형태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의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일반적인 애도의 틀 안에 담아두려 했던 것은 참으로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노예나 주인이나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다. 경이로운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의 신비 앞에 결국은 모두가 무릎 꿇는다. 먼저 떠난 이가 어딘가에서 행복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과 꿈에서라도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기적을 간절히 기도하며 각자의 방식대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신이 아닌 보통 인간이다.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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