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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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바람 불지 않아 좋은 날

2019-11-21 (목) 엄영미(SF갓스이미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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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바람이 불지 않는다. 부는 바람을 핑계로 걷는 것을 잠시 뒤로 미뤘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적당한 체감온도와 살랑거리는 바람에 기분 좋을 정도다. 2년전 내가 아침마다 걷던 뚝길을 찾았다. 여유롭게 이어지는 산마테오 다리 위의 차량 행렬들, 안개가 끼어 맑은 하늘을 볼 수는 없지만 적당한 풀내음과 어울리는 들꽃들, 물이 잠시 빠져나간 틈을 타서 드러내는 조개들의 얼굴들, 갯벌 뒷쪽으로 출렁이는 물결, 그 뒤로 자리잡은 어느 정박선! 이 모든 것들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의 모습 같다.

이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나는 마치 2년동안 휴학을 마치고 새롭게 등교하는 학생처럼 설레임으로 다가갔다. 먼저 한켠에 자리를 잡고 초등학교 시절 국민체조를 구령했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간단한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근육이 놀랄지도 모르니 오늘은 천천히 걷기만 하자 다짐하며, 나의 몸을 세상의 연락망과 잠시 차단시켰다. 오늘은 눈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며, 코로는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귀로는 나의 찬양소리를 들으며, 머리로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걸어보기로 했다.

참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맑은 공기가 있는 캘리포니아에 산다는 것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미국 오대호 주변에 생명을 위협할 수준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곳 사람들에게 미안함과 부담감이 마음 한켠에 밀려온다.


약 3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천천히 한 시간 정도 걸으며 상념에 잠겼다. 떠나온 모국 대한민국의 앞날을 걱정도 해보며, 엄마는 건강히 더 오래 사셔야 할텐데, 조카는 취직이 되었을까, 사별한 언니는 외롭고 힘들지는 않을까, 사업을 하는 남동생은 여전히 잘 하고 있을까, 교회일이 더 바쁜 여동생은 오늘은 어느 집을 심방하고 있을까 등등…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식구들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조금만 신경쓰면 안부를 물을 수도 있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민생활에 젖어버린 것 같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아 좋은 날이다. 걸을 수 있어서 더 좋은 날이다. 생각할 수 있어서 더 더욱 좋은 날이다. 내일도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한국에 안부 전화부터 해봐야겠다.

<엄영미(SF갓스이미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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