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신(神)의 길이 있다. 사람이 만든 길이 아니라 신이 낸 길이다. 대관령은 강릉 사람에게 ‘신들의 땅’으로 불린다.
산신 김유신 장군과 성황신 범일국사가 깃드신다고 믿는다. 장군은 말갈족으로부터 강릉을 지켜냈고, 국사는 선종을 전파해 깨달음을 심었다. 이들은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고, 사람들은 제를 지낸 후, 신의 길을 걸었다.
대관령은 백두대간의 거대한 철옹벽이었다. 옛 영동사람들은 내륙으로 가기 위해 몇 날을 아흔아홉 구비를 돌아 험준한 산을 넘었다. 강원도 관찰사 송강 정철이 지나면서 ‘관동별곡’을 쓰고,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을 데리고 친정 가던 길이기도 했다. 과거 보는 선비들이 한양을 향해 넘고, 보부상들이 땀 흘리며 오르던 길이었다.
모처럼 귀국길에 대관령을 넘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은 꽃길이었다. 훤하게 뚫린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을 떠난 버스는 3시간도 채 안 걸렸다.
멀리 오대산 등성을 바라보며 대관령에 이르니 광활한 목장지가 펼쳐졌다. 1000m 고지의 구릉을 따라 600만 여평의 초장이 구비치고 흰 풍력발전기들이 솟대처럼 솟아있다. 목장 입구 팻말의 글을 읽었다. 봄이면 들꽃이, 여름이면 일렁이는 목초 바다가, 가을엔 계곡의 단풍이, 겨울이면 은빛 눈밭이 가슴에 머무는 곳 - 하늘 목장.
목장 길 따라 살찐 젖소들과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다. 전망대에 올라 발아래 강릉 시내와 푸른 해무에 잠긴 동해바다를 바라본다. 고국의 산하가 정겹다. 서편으로 계방산, 용평 쪽에 발왕산이라고 했다.
평창 횡계리의 중간지점인 반정에서 숲길로 들어섰다. 대관령 옛길이란 표판 위에 김홍도의 대관령 고화(古畵)가 붙어있다. 녹음을 뚫고 한줄기 빛이 내리고 선선한 바람이 흘렀다. 신의 숲에 들어서며 환대 받는 느낌이다. 멀리서 징소리가 울린다. 재궁골 신터에서 제사라도 올리는 것일까?
옛 주막터에 도착했다. 복원한 초가인데 주모도 감자전도 없다. 널찍한 평상에 앉아 옛길의 서정과 고속도로의 문명을 생각했다. 대관령의 신들은 과연 어디에 머무실까? 약초향이 그윽한 주막은 고즈넉했다.
대관령옛길은 오리쯤 더 내려가 어흘리에서 끝났다. 길옆에는 정성스레 쌓은 돌탑이 많았다. 길도 깊이 패여 있었다. 이 길은 하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과 기원을 모아 탑을 쌓고, 패이도록 걸은 신의 길이었다.
평창으로 나와 근처 봉평면의 이효석 ‘문학의 숲’으로 향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속의 흰 꽃은 가을비에 거의 졌다. 봉평 냇가 섶다리를 건너니 허생원이 동이를 운명적으로 만났던 충주댁 뜨락이 보인다. 또 그가 성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지샜던 물레방아간도 재현해 놓았다. 새 문명으로 옛 문화의 상상력을 살려내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저녁 무렵, 대관령에 든지 10년째 되는 선배 부부를 찾아갔다. 그들은 계곡 곁에 그림 같은 양옥 수 채를 손수 짓고 펜션을 지키며 살았다. 도착하니 잔디를 손질하다가 흙손을 털고 맞아준다. 도시에서 큰 사업도 하고, 지자체의 장도 하며 분주하게 살다가 장년에 병을 얻어 귀농을 결심한 것이었다. 문명을 버리고 자연을 택했다고 웃었다.
“행복하세요?” 내 물음에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치 않고 지금 이 시간을 즐기며 산다고 했다. 그는 또 말했다. “그러나 행복은 감정이라 축적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심리학에서 행복이 지속되거나 축적되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큰 즐거움이라도 적정선을 넘으면 더 이상 증폭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위 ‘행복의 평균치’ 이론이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누군가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가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공감해요. 큰 행복을 기다리느라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수년간 산악자전거를 타며 튼실해진 손으로 색소폰을 잡고 ‘한계령’ 을 멋지게 연주했다. 대관령의 가을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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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