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가요무대 녹화 현장에서
2019-10-17 (목)
채영은(주부)
지난달 한국에서 시아버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홀로 되신 어머님 곁에서 각종 일처리를 하느라 다른 때보다 더 길게 머물게 되었다. 인생의 전부셨던 아버님이 황망히 떠나시고 난 후, 어머님은 그간 오랜 간병으로 몸도 마음도 지치신 상태로 일상의 많은 부분을 힘들어하셨다. 그렇다고 외며느리가 옆에서 크게 해드린 건 없다. 매일 삼시세끼 같이했고 각종 드라마 같이 봐드리고 집에 있는 서류뭉치 같이 찾고 병원과 공공기관 방문 등을 동행했을 뿐. 그리고 하염없이 몰려오는 아버님과의 오랜 추억담을 풀어놓으실 수 있게 잘 들어드렸을 뿐. 여느 싹싹한 여인들 축에도 못끼는 애교 빵점 며느리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어느 월요일 저녁, 오랜 세월 동안 두분이 매주 즐겨보시던 가요무대를 틀어놓고 보던 중 방청신청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님. 가요무대 녹화하는 곳에 한번 가보실래요?” 갑작스런 제안에 어머님은 방송국이 처음이라며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아하셨다. 일단 KBS 홈페이지 온라인 가입과 핸드폰 인증을 거쳐 간단한 사연을 올렸다. 그 다음날 화요일 낮에 당첨 확인 문자를 받았다. 티켓 배부는 녹화 당일 5시인데 여러 블로그 후기마다 무조건 일찍 가서 줄서야 한다고 해서, 내가 먼저 줄서서 티켓을 받고 남편이 어머님을 모시고 따로 시간맞춰 오기로 했다. 3시 KBS별관에 도착하니 이미 일찌감치 자리펴신 분들이 다수였고 그 틈에 끼어 기다리다가 4시30분에 공개홀 로비로 이동한 후 5시부터 본인 확인을 거쳐 좌석 번호가 적힌 티켓을 받았다.
6시부터 녹화장 입실이 시작되어 30분간 자리 정돈 후 사전MC의 설명을 듣고 7시께부터 녹화가 시작되었다. 늘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시는 김동건 아나운서와 그 인자한 음성, 멀리 계시는 해외동포들과 해외근로자를 향한 인사도 여전히 뭉클했다. TV에서 보는 것과 동일한 무대 위로 가수들이 등장하고 열창하면서 NG나 앵콜 요청 없이 1시간 안에 모든 녹화가 끝났다.
처음엔 소녀처럼 박수치며 좋아하시다가 중간중간 아버님 생전 좋아하신 노래가 나올 때면 눈가가 살짝 촉촉해지는 듯했던 우리 어머님. 그동안 더 잘해주지 못하고 더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회한을 서서히 내려놓으실 수 있기를, 앞으로 혼자 계실 시간들을 잘 견디시길 바라는 아들 내외의 마음이 구성진 노래가락 위로 함께 전해졌던 밤이었다.
<채영은(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