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말이 너무 재밌다. 곧 쓰레기통으로 향할 초콜릿 봉지를 생각 없이 까버리고 그 내용물을 입에 오물오물 물고는 귀찮다는 듯 대답한다, “응, 냉장고 위에 있던 거? 그거 내가 까먹었어. 나른한 오후, 카페에서 나오는 익숙한 멜로디에 눈썹까지 열심히 긁어가면서 고심 끝에 뱉는 혼잣말, “아 뭐지? 까먹었어.” 얄미운 친구의 아픈 데 쿡쿡 찌르는 전 남자친구 저격 질문 폭격에 한껏 쿨한 척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그 뒤에 남을 공허함은 모르는 것처럼. “몰라, 다 까먹었어.”
나는 최근 알츠하이머 센터에서 치매에 걸린 어르신을 돕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로써 나는 바쁜 학업과 업무 속에서도 주위를 살피는 이지적이면서도 따듯한 여성의 이미지가 굳혀졌길 바란다.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사실 인정이 목적이라면 어차피 기억도 못 할 노인네들의 수발을 드는 것보다야 훨씬 효율적인 활동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단순하다. 잊었다는 것조차 잊는다는 것, 기억하는 것조차 기억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현상이 흥미로웠기 때문.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께서 생각하는 시간의 지평선은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기에 나의 이런 이기적인 호기심은 쉽게 충족되었다. 나의 아줌마 감성 꽃무늬 치마를 보고 한껏 칭찬해주시던 할머니, 화장실 가던 길에 다시 마주치더니 너무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같은 칭찬과 질문을 반복하신다. 매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어떤 할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나를 붙잡아 놓고 본인의 대학 첫날 이야기를 한껏 늘어놓으시고는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리고 복도에서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을 때는 여기서 뭐 하는 중이냐고 심하게 호통을 치셨다. 아직 섭섭함이 쌓일 정도의 애착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저 관찰할 뿐이다.
아주 경우 없고 건방진 발언이라 여겨질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조금 부러웠다. 기억이 주는 고통과 잔인함에서 자유하니까.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너무나 사랑했던 기억, 상처의 기억들은 깜빡이도 안 켜고 잔인하게 일상을 파고든다. 너무 기분 좋게 춤을 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새끼발톱, 야속하게도 금세 아물어 버린 상처에 뜬금없이 주저 앉아 오열하게 되는 것이 기억이 주는 잔인함이다. 어떤 기억의 편린이 어떻게, 언제 찾아오게 될지 몰라 무뎌지려고 끙끙대다가도 영영 사라지면 어쩌나 두려움에 떤다. 사랑의 기억은 천천히 그 빛을 잃게 될 것이고 상처받은 기억도 조금씩 다른 색을 입게 될 것이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그 빛이 바래고 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변해버린 내 자신을 원망, 또 억울해하겠지. 기억을 기억한다는 것은 순전히 고문이 아닌가.
앞서 경우 없는 발언을 조금이나마 해명하자면 나는 단순히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들이 웬만한 다른 어른들보다 훨씬 좋다. 우리의 기억은 참으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애초에 현재의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결과 헤쳐 나가야 할 오늘의 현실이 있기에 절대로 온전하게 기억을 꺼내 볼 수 없는 것처럼, 기억은 알게 모르게 본인이 유리한 방법으로 사용되곤 한다. 기억은 자기 마음대로 미화되어 돌이켜 보면 누구를 더 사랑했는지 모를 일이고 기억은 무뎌져 내일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역사는 왜곡되고 폭력은 계속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기억이 다 맞다고 아는 척 몰아붙이는 걱정과 고집을 듣고 있는 것보다 반복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훨씬 좋다. 나는 몇 번이고 새롭고 싱그러운 표정으로 내 치마를 칭찬해주셨던 할머니께, 나에게 불안 섞인 호통을 치시며 본인의 취약함을 보여주셨던 할아버지께 감사했다.
아무런 고통 없이 지금을 살아가는 노인분들을 보면서 결국 나는 그 뻔하고 흔한 이별 이야기를 하고 있나 보다. 받은 상처만큼, 한순간에 무너진 수많은 사랑의 약속들만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이 조금은 부러웠고 지금을 가장 솔직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그렇게나 가슴 뛰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없는 이름이 돼야 하는 게, 잊은 척 살아가야 하는 게 참 쉽지가 않다.
까먹는다는 말은 참 재밌다. 껍데기를 벗겨 먹는 행위를 지칭하고 기억하고 싶은 정보를 단순히 잊어버렸을 때 쓰는 탄식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리고 잊으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오는 기억의 편린을 대외적으로 잠재우고 싶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을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진정 까먹는다는 것은 하굣길 까먹는 사탕 봉지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언어의 장난에, 허를 찌르는 농담같은 인생에 오늘도 어김없이 두 손 두 발 내밀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씰룩거리는 것이 아마 웃고 있는 중인 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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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