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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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이름

2019-09-25 (수) 전성하(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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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 한자로 별 성(星)에 물 하(河) 자를 쓴다. 초등학교 때 호기심에 국어사전에서 내 이름을 찾아보았는데 한자까지 똑같이 사전에 수록되어 있었다. 은하수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걸 읽고 난 다음부터는 밤하늘의 별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막연한 책임감이 들었다. 몇 년 전 미국에 오면서 발음이 어려운 한국이름을 대신할 영어이름도 밤새워 검색하면서 골랐다. 그때 지은 영어이름을 커피 주문할 때 요긴하게 써먹는다.

육아 카페에 가보면 아기 이름을 정해달라는 글을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어떤 이름이 더 나을지 혼자 고민고민하다가 대중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버버리라는 이름은 트렌치 코트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정 상표는 어떤 물품을 통칭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현대 예술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꼽히는 뒤샹의 ‘샘’처럼 일상적인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 대단한 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빨강머리 앤은 평범한 제라늄 화분에 이름을 붙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아주머니도 누가 이름 말고 여자라고만 부르면 싫으실 거잖아요. 이제 이 제라늄을 ‘보니’라고 부를래요. 오늘 아침에 침실 창 밖의 벚나무에게도 이름을 붙여줬어요. ‘눈의 왕’이라고요.” 앤은 주변 자연에도 ‘연인들의 오솔길’, ‘유령의 숲’ 등의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눈의 여왕은 앤에게 특별한 친구가 되고 보통 오솔길은 낭만적인 장소로 변한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간단하지만 대단한 일이다 그건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일이다.

최근 늦둥이 막내를 임신하면서 두 남매 간에 서로 자기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서 지어야 한다는 논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기를 낳고 나서 한달 안에 출생신고를 하면 되기 때문에 태어난 일시를 따져보기도 하고 1, 2주 정도 시간을 가지고 작명하곤 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그냥 이름 없는 아기였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아기를 낳은 다음날 병원에서 출생신고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미리미리 이름을 지어놓는 게 일반적이다. 태어나기 전에 이름이 준비되어 있다니 신기하다. 내년 초에 태어날 셋째의 이름은 아직 고민 중이지만 태명은 ‘순둥이’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 나이 많은 엄마를 안 힘들게 해서 순둥이고, 태어나서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름대로 될지어다.

<전성하(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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