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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아들의 첫 데이트와 한국어

2019-09-25 (수) 방무심 / 프리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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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 아들 녀석이 결혼할 생각은 없고 스포츠에만 관심을 두고 지내던 생활이 어언 35살이 넘어가는 즈음이다. 일가친척 없는 단출한 가족이기에 아들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나의 초조함은 더 해만 갔다. 녀석과의 충격적인 대화는 2년 전을 끝으로 다시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빠는 손주를 보기 위해서니까 내가 한국에서 양자를 입양하면 안 되겠어?” “그래 너의 인생이니 다시는 너의 결혼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충격적이고 당혹감의 대화는 메아리가 되어 나의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아 가며 큰 상처를 남기고 다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던 이른 봄 새벽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 거센 빗줄기 소리는 내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로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보았는가? 혹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으니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면 심정에 변화가 있을 수 있지 않겠나? 한가한 주말 오후에 마주 앉아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지하게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아! 이게 웬일인가! 그냥 묵묵히 듣고 있으니 예전과는 다른 모습에 천군만마와 같은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오랜만의 대화에 후련하고 더 좋을 수 없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설득을 했다.

세월이 약이던가. 그동안 많은 친구의 들러리를 서느라 이곳저곳 다니기도 했고 이제는 친구들의 2세도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의 생각이 변했음을 짐작 할 수가 있었다. 녀석이 종종 만나는 동창생 모임 중에도 아직은 친근한 싱글도 있지만, 가는 세월을 기다릴 수는 없기에 아비가 나서기로 하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 규수를 소개받았다. 어느 정도의 분위기는 나의 몫이기에 아들의 소개와 함께 한국어에 관해서는 수월히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며 혹시 어려운 단어는 쉽게 설명해 주면 대화에 별문제가 없다는 말을 곁들어 적어 보냈다. 아들 녀석의 첫 편지를 내가 써야 한다는 씁쓸함을 느껴가면서 젊었을 때 연애편지 보내던 생각이 들며 웃음을 참아가며 솔직 담백하게 써 내려갔다.


이틀 후 호감 어린 진솔한 답장을 받았으니 아들에게 이메일 주소만 전해주면 시작은 반이 되겠는데... 아직도 게으르고 결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한 녀석에게 이매일 주소를 전해주며 며칠간 눈치를 살폈지만, 소식이 없다. 안 되겠다 싶어 매일 저녁 재촉을 한 지 열흘 만에 한국으로 보냈다는 아들의 답변을 듣고 한시름 놓고 기다렸다. 어려서부터 한글 학교에 다녔기에 어설프지만, 한국어로 이메일을 보낸 듯했다. 짧은 기간이 흐른 후에는 카톡으로 오고 가는 듯하여 저녁에는 까톡, 까톡 하는 소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이제는 서로가 마음에 들어 사랑의 ‘콩깍지’만 씌워지면 될 일이니 응원을 하며 기다렸다. 작년 늦여름에 시작한 연애가 결실을 보아 연말에 한국에서 둘만의 첫 대면을 갖고 아들은 그 후에도 한 번 더 한국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이달 초에 사귀는 아가씨가 미국으로 짧은 일정으로 방문하였다.

저녁을 같이하며 들려준 이야기는 웃음을 참으며 들어야 했으나 황당하면서도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머님! 글쎄 첫 만남의 식사 자리에서 오빠가 한 말이에요” “든적스러운 것을 잘 먹네요” 했어요 하며 웃는다. 아~ 이런 이런! 아들 녀석은 특히 질척(?)한 음식은 선호하지 않으니 당연하겠지만,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국에서 자랐다면 아가씨는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뻔한 실례이다. 시간이 얼마 지난 후 또 오빠가 한 말이란다. “저 변소 좀 갔다 올게요!” ㅎㅎ 자식! 화장실이란 말을 알 텐데... 요즘 젊은이들은 ‘뒤깐’이라고 했으면 못 알아들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듯싶었다. 고국에서는 자취를 감춘 단어를 종종 써온 내 탓이 크겠지만 그로 인해 웃을 수가 있는 행복한 저녁 모임이었다.

머지않아 한글날을 맞이한다. 그동안 오랜 기간 열정과 사명감으로 저의 자녀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과 지금도 매주 토요일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시는 한글학교 여러 선생님의 열정과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방무심 / 프리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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