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들어가서 느끼다

2019-09-23 (월) 12:00:00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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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와 같이 숨 쉬고 같은 땅을 딛고 고만고만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해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작은 가시에 찔려도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프다는 것을 잘 안다. 누군가가 나를 해치려고 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 놓이는 일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경험일지 겪지 않고서도 알고 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아픔 혹은 부재가 그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큰 절망과 상실을 안겨줄 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공감’이라는 울타리 안에 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화면 너머로 누군가가 슬피 울면 나도 이내 슬픈 감정이 든다. 대본대로 연기하는 것뿐일 테지만 그 상황에 놓인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나와 동시대에 살지도 않는 문학 작품 속 주인공의 절절한 사연에 내 마음이 동하는 것도 나는 그에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감의 어원은 19세기 말 독일어 Einfuhlung에서 처음으로 나왔는데, ein(안에)과 fuhlen(느끼다)이 결합된 말이라고 한다. 즉 ‘들어가서 느끼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쓴 책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 따르면 ‘공감은 다른 사람의 신발에 내 발을 넣어봄으로써 느끼는 그 발의 체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리 타자의 마음에 들어가서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적 우위를 가진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인간은 지금껏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 인간의 특별한 능력 ‘공감력’이 더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력을 연구하는 미시간대 윌리엄 촙틱 심리학 교수는 공감력 저하의 원인들로 소셜미디어의 폭발, 폭력과 집단 따돌림의 증가, 성공 기대치의 증가, 양육 방식의 변화를 꼽았다.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기보다 손안의 핸드폰과 친구가 되는 요즘 세태와 서로 도우며 나아가기보다 치열하게 경쟁하라 배우고 약자를 밟고 올라가야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공감 능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내가 그 아픔과 고통을 충분히 인지하고 예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내하며 저지르는 것이다. 이에는 ‘공감’의 테두리를 넘어선 증오심과 파괴력이 동반한다. 죽을 듯이 미워하는 마음과 누군가를 직접 찌르고 쏘아 죽일 수 있는 잔인성과 실행력이 점차 번져가는 사회를 목도한다.

이웃을 벽돌로 수차례 내리쳐 죽였다고 한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토막 내어 내다버렸다고 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함께 눈물을 흘리기보다 셀카를 찍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온다. 죽음을 생중계하는 사람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이를 퍼다 나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진다. 끔찍한 뉴스가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이러한 뉴스에 무뎌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의 공감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러한 괴물을 키워내는 사회구조의 문제인가. 그러한 괴물들의 마음조차 공감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의 공감력 또한 쇠퇴하고 있는 것이 맞다. 나는 그러한 괴물의 마음에까지 들어가서 깊이 어루만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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