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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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 아들과 손자

2019-09-11 (수) 김옥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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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새벽 다섯시에 큰 며느리가 전화를 했다. 보통 새벽이나 저녁 늦게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왔다면 그건 분명히 좋은 소식은 아니다. 나는 가슴이 철렁해 전화를 받았더니 큰애가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오죽 아프면 전화로 나를 불렀나 싶어서 운동도 안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애네는 유니온 시티에 살고 있어서 680을 타고 가다가 스놀로 들어가는 84번의 샛길로 가는 것이 가장 빨리 가는 길이다. 내가 그날 얼마나 차를 빨리 몰았는지 아니면 마음이 급해서 어쩌다가 그 동네로 들어가는 길을 놓치고 엉뚱한 길로 들어가면서 중앙 분리대를 앞바퀴로 크게 받아 바퀴가 완전히 망가졌다.

거의 오십년을 운전해 왔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며느리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했더니 곧 큰 손주 녀석인 쟈슈아가 달려나왔다. 겨우 서너달 밖에 안된 차의 타이어를 울며겨자먹기로 바꿀수 밖에 없었다. 150불이라는 가격이 나왔다.


아들인 챨리는 약간의 착시 현상이 온 것 같았다. 지난 몇 달간 일만하다가 처음 노동절에 쉬었다고 한다. 그애는 전화국의 테크니션인데 매일 오버 타임을 해서 벌써 일년 간 버는 돈을 다 벌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를 못해 너무 탈진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나 했다.

그애는 의사를 싫어했다. 여직껏 별 병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애였다. 그런데 내가 봐도 너무 말랐다. 우선 며칠 쉬기로했다. 그애는 어릴 때부터 늘 내겐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릴 때 내가 미국으로 떠나서 거의 십 년을 제 이모와 사촌 형제들과 살아서 늘 엄마의 사랑에 목말라했다. 어릴 때부터 늘 누가 날 버리지 않나하는 걱정을 하며 살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며, 며늘애는 울먹울먹하며 내게 말했다.

13살에 미국에 와서 또 영어도 한마디 못해서 그애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한 반년간은 벙어리처럼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 마음대로 미군에 자원 입대해 처음엔 용산에 배치되어 의장대에 뽑히기도 했던 핸섬한 애였다. 미 의장대는 보통 동양인이나 다른 유색 인종보다 백인을 선호하는 그야말로 엘리트중에 엘리트 집단이라고 들었다.

또 군대 생활 중 한 병사가 사고로 다이나마이트에 다리가 잘라진 사건도 목격하면서 그애는 많은 트라우마를 겪으며 살았다. 그리고 이십 대에 일찍 결혼을 한데다 아이까지 생겼지만 그야말로 자리잡고 살기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 시절 제 처와 한번 크게 다투면서 하룻밤 집을 나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진지하게 자살의 유혹도 받았다고 고백했다.

현대인들의 병은 의외로 우울증 환자가 많다. 이 풍요로운 시대에 먹고 살기 바빴던 가난한 때보다 더 정신적인 병이 생긴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싸울 때보다 이제 배가 부르면 해이해 지고 딴 생각이 나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 돌아오기 전 큰 손주인 쟈슈아가 슬그머니 내 손에 지폐 한장을 쥐어주었다. 백달러 짜리였다. 그 녀석 말이 할머니가 타이어 때문에 돈을 썼으니까 거기 보태라는 것이었다. 나는 신통하기도 하고 그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언제 이만큼 자라서 이젠 거꾸로 지가 내게 용돈을 주는 처지로 바뀌었나를 생각하니 다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에겐 용돈을 받지만 손주에게서 용돈을 받는 일은 드물다. 그것도 백달라짜리를---.


다음날 며늘애가 전화를 했다. 의외로 제 자신이 먼저 의사에게 가겠다고 해서 약까지 받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해서 그것까지 먹었으니 한시름 놓았다고 밝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며칠 온 식구가 함께 여행을 떠나보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했다. 이런 때는 맨날 쳇바퀴 도는 생활에서 벗어나 훌쩍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부딛혀 보면 낫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가족간에 정도 쌓고 또 육신적인 건강한 힐링이 되는 이중의 효과가 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새로운 환경은 새로운 생각과 흥미를 가지게 하고 흥미를 가지면 새로운 활력이 생길 수 있다. 지금 내 주위에 몇명의 사람들이 치매의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도대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멍하니 몇 시간이고 눈을 감고 말수가 줄어 든다.

현대인은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정신의 건강함을 잃고 있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자고, 되도록 혼자 있는 것보다 많은 친구들을 만나 무슨 대단한 대화가 아니라도 함께 떠들다 보면 그 자체가 위로가 된다. 남을 씹는 것만치 재미있는 일은 없다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모두 위로 받을 자격이 있다.

<김옥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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