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선배님이 전화를 주셨다. “녹음 파일을 하나 보냈으니 들어보세요” 하신다. 무슨 내용인지 서둘러 열었다. 선배님 따님, 실비아 남이 뉴욕 타임즈, 대일리 라디오의 유명 호스트, 마이클 바바로(Barbaro)와 가진 인터뷰 프로였다.
30대 한인 2세, 실비아씨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젊은 교수로 가족의 평생 비밀을 풀기 위해 얼마 전 북한을 다녀왔다. 6.25 동란 직후, 어린 자식 넷과 28세 부인을 두고 홀연히 실종된 할아버지를 찾아 입북을 감행한 것이다. “왜 그가 이북으로 가셨을까?” 70년 동안 못 푼 가족들의 한 많은 의문을 밝혀내겠다는 일념으로 당찬 손녀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산가족상봉 신청서를 낸 것이다.
“제 할아버지는 동경제대를 나오신 공학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동란이 난 2개월 후,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넷, 셋, 한 살, 3주 난 4남매를 두고 가족들에게 아무 전갈도 남기지 않은 채 이북으로 가신 것 입니다.”
왜 그가 갔을까? 남은 가족들은 세 가지 가능성을 유추해왔다고 했다. 첫째는 그가 인민군에 납북 당한 것, 둘째, 당시 공산,사회주의에 동조적이었던 많은 지식인들처럼 이념을 따라 가족을 버리고 스스로 월북한 것. 셋째, 월북은 아니지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못 돌아왔을 것. 어느 쪽인지 몰라 평생 괴로워했다고 한다.
“당시 꽃다운 나이에 교수부인에서 남의 집 허드렛일 도우미로 변해 자식들과 연명하신 할머니는 그래도 피치못할 사정으로 납북당했다고 믿으셨어요. 그러나 자식들은 달랐습니다. 공산 이념을 신봉해 가족마저 버리고 월북한 몰인정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평생 살아오셨지요. 특히 맏딸인 제 어머니와 막내 외삼촌의 속 깊은 분노는 오랜 화산처럼 끓었습니다”
호스트 바바로씨는 물었다. “그래서 손녀인 실비아씨가 이북에 가기로 결심헸군요. 그런데 진실을 알아냈나요?” 실비아가 대답했다. “평양에 도착한 날, 북한보위국에서 할아버지 기록을 찾았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북에 있는 할아버지 자식들도 찾았는데 만나보겠냐고 물었습니다. 전혀 예상 밖이라 깜짝 놀랐지요.”
난생 처음 보는 이북 가족들이지만, 얼굴 모습에서 같은 유전자를 나눈 가족이란 확신이 금방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재혼하셔서 자녀를 낳고 1987년 작고하셨다고 전했다. 놀라운 건 그들이 할아버지 일기장을 갖고 나왔는데 그 속에 오랜 의문을 푸는 열쇠들이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진 1950년 8월, 평양의 무슨 집회에 참석하셨대요. 전쟁 직후까지 삼팔선이 열려 있었는데, 집회 후 서울로 돌아가려 하니 삼팔선이 완전히 막혀버렸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육필일기장을 보여주셨어요. 8월26일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부인, 아이들과 꼭 살아만 있어 주오. 내 기필코 돌아가리라. 자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밥을 삼킬 수가 없소. 날 기다려 주오.”
그 후, 할아버지는 5년을 더 계시다가 마침내 서울서 온 같은 처지의 여자분과 재혼하셨다고 했다. 수년을 기다리신 사실만으로도 이남 가족을 못 잊어 한 증거라고 이북의 삼촌은 설명했다. 그러면서 6.25는 분명 비극이지만 전쟁이 없었더라면 자기들, 이북 가족들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고 했다. 실비아씨는 언젠가 어머니와 다시 찾아오겠다고 기약없는 약속을 하고 평양을 떠났다.
호스트는 인터뷰를 끝내면서 물었다. “평생 의문이 풀려 이남 가족들이 기뻐했나요?” “전혀요, 제 어머닌 아무 말씀도 없이 홀로 울고만 계셨어요. 가족을 버리고 사라진 부친에 대한 70 평생의 한이 어찌 일기장 몇 귀절로 풀어질 수 있겠어요? 아마도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면 그 만큼의 세월이 더 필요할지도 몰라요.” 나는 이 대목에서 월북한 할아버지가 6.25 전쟁으로 적화통일이 되면 금새 서울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비아씨는 덧붙였다.”남북이 오늘 당장 통일이 돼도, 한민족이 하나 되기까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믿어요. 지난 70년 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의 처절한 이념 투쟁과 반목과 혼돈과 시행착오를 겪어야겠지요.”
올해 6.25와 광복절 즈음, 이북에선 연신 미사일을 쏘아대며 남한 정부를 조롱하고 비방했다. 아마도 트럼프와의 대화를 촉구하며 남한의 기를 꺾으려는 소위 통미봉남의 기만술일 것이다. 그런데 남한 TV 방송은 작년 4월, 판문점에서 남북 수뇌들이 활짝 웃으며 악수하는 장면들을 계속 틀어주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다가온 통일만 되면 금방 평화가 닥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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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 ^Enviro Engineering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