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별빛 속에 핀 들국화 한 송이

2019-08-15 (목) 대니얼 김 그린벨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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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마산 시의 중심에 위치한 아름다운 무학산 중턱에 나의 모교인 마산 고등학교가 옥포의 명량해협처럼 마산만의 굴곡진 좁은 해안선을 따라 진해만을 굽어보며 자리하고 있다.

봄이 되면 학교 주변에는 팔십여 년전의 선배들이 심어 놓은 수백그루의 벗꽃나무가 숲을 이루어 학교주위를 온통 분홍색 함박 벗꽃눈으로 뒤덮었다. 8월이 되면 학교 뒤 무학산 중턱 자락을 따라 나있는 조그만 개울 양쪽 길가에 코스모스며 들국화가 야생화에 섞여 장관을 이루었다.

2017년 가을 나의 승용차로 워싱턴을 떠나 세난도의 루레이 동굴이 있는 시골길을 가는 중에 산들바람에 꽃이 흔들리며 청량한 아름다움으로 넓은 들판을 뒤덮고 있는 오색찬란한 코스모스와 들국화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수 많은 야생화들 속에 파묻혀 내 고향의 꽃들을 생각하며 짜릿한 정취 속에 빠져들었었다.
지난 해 3월, 나는 이 아름다운 들국화와 꽃씨를 구하고 싶었다. 나의 집 인근에 있는 여러 곳의 화원을 찾아다니다가 바라던 들국화 꽃을 찾았다. 노란색, 흰색 보라색 들국화 몇 그루와 꽃씨 몇 봉지를 사서 나의 집 꽃밭에 심고, 꽃씨도 뿌려서 정성을 다해 가꾸었다.


8월이 되어 수많은 들국화가 활짝 피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들국화가 몸통은 가는데 비해 큰 키 때문에 가지마다 핀 수많은 꽃들을 떠받치기에 힘이 부친 나머지, 예쁜 들국화들이 꽃밭에 드러누워 버렸다. 꽃들을 일으켜 세워 놓고 둥그런 철망을 쳐서 그 안에 꽃들이 쓰러지지 않게 해놓았지만, 갈색의 철망과 꽃 색깔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여름에 접어들어 비가 자주 많이 내리게 되자 시뻘겋게 녹이 슬어 보기 싫은 철망을 녹슬지 않는 자재로 바꿀려고 화원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보았으나 신통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나의 친지 한분이 쑥을 추천했다. 쑥은 이른 봄에는 연한 잎으로 쑥떡이며 쑥국을 만드는데 쓰여 우리들의 입맛을 돋우어주지만, 여름에는 대나무처럼 곧게 자라는 특성을 이용해 들국화 꽃들 사이에 심어 놓으면 꽃들이 쓰러지지 않게 받쳐준다고 했다.

나는 즉시 뒤뜰 담 넘어 공터에서 자라고 있는 쑥들을 들국화들 사이에 골고루 심었다.
들국화들이 7월 말부터 화려하게 피기 시작했다. 쑥 덕분에 앞 뒤쪽의 들국화들이 쑥과 엉켜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쑥이 수명이 다해지기 시작하자 허였게 변하며 시들어 버렸다. 주위 분들은 보기싫은 쑥을 뽑아서 버리라고 했다. 그래서 쑥을 한 그루 뽑아보았는데, 들국화도 몇 그루가 함께 뽑혀 나왔다.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 였다.

수많은 쑥을 다 파낸다면, 들국화들도 많이 뽑혀나와 듬성듬성 빈 들국화 자리가 보기에 흉할 것 같아 쑥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들국화가 지고나면 쑥을 함께 추수하여 들국화는 꽃씨를 받아두고, 쑥은 뽑아서 뒤 뜰 울타리 밖의 공터에 땅을 파서 묻어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가 만난 들국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 오래 전, 대학 재학 중에 육군사병으로 입대하여 유격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한 밤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서 10여 분가량의 짧은 휴식시간을 가졌다. 피곤해서 쏟아지는 졸음으로 인해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나는 땅바닥에 풀썩하고 드러누었다. 한여름 밤의 하늘에는 수많은 별빛이 형광처럼 나의 눈 앞에 쏟아져 내렸다. 영롱한 별빛 속에 작은 들국화 한 송이가 내 눈 앞에 다가왔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상큼한 꽃향기가 코끝에 물씬 풍겨나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피로했었는데, 들국화의 꽃향기로 가까스로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다.

꽃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꽃은 그 아름다운 색으로 사람의 눈에 기쁨을 준다. 꽃은 향기로운 내음으로 코를 즐겁게 해준다. 꽃은 고귀한 자태로 사람들의 굳은 얼굴에 미소를 되찾아준다.

꽃은 꽃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을 준다. 사람 사는 세상에 우리도 누군가에게 꽃이 되어 보자.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전해 주는 꽃 같은 사람이 되어보자. 배제 대신에 공존을 생각하고, 차별 대신에 다름에 대한 존중을 보이는 그런 꽃같은 사람 말이다.

<대니얼 김 그린벨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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