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퀘렌시아
2019-08-13 (화)
유명현(동시통역사)
퀘렌시아(Querencia)는 투우장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소를 위한 공간을 뜻하는 스페인어다. 퀘렌시아에 있는 동안 소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지 않기에 안전함을 느낀다. 온전히 본연의 모습으로 숨을 고른다. 에너지를 얻는다. 소가 마지막까지 싸울 힘을 장전하는 특별한 장소다. 그래서 이 단어는 안식처, 피난처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번씩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유용하게 작용하는 생산적인 고독의 장소다.
고독과 외로움은 엄연히 다르다. 누군가와 만나서 다섯 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집에 가는 길에 다시 전화를 하고픈 마음은 외로움이다. 타인으로부터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고독은 다르다. 자발적인 고립이며 성숙을 가져온다. 관계중심적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으로 인해 피로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장소다. 에너지가 장전된 후엔 더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 의미 깊은 관계형성 속에 더 많은 친절을 베풀 수 있다. 내 주변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외향적 인간으로 추측한다. ‘명현씨는 사람을 참 좋아하나 봐요’라고 덧붙인다. 나만의 퀘렌시아 속에서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하고 선대했기에 여분의 에너지를 사용할 뿐이다. 건강한 이기주의자는 효율적인 이타주의자다. 비행기 추락 시 산소 마스크가 내려오면 자신이 먼저 껴야 한다. 이것은 비행기 안내방송과도 일치한다. 내가 먼저 숨을 쉬어야 옆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지인과 예기치 못한 마찰이 있었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당시에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설명하기 유치할 만큼 사소한 이유였지만 묘한 억울함과 은근한 패배감이 나를 힘들게 했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까지도 감정에 북받쳐 괴로운 시간을 보냈을 텐데 퀘렌시아 속에서 조용히 용해시켜 버리는 메커니즘을 개발했다. 잠시 휘몰아치는 찻잔 속에 태풍이였거니 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뛰쳐나왔다. 지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하고 현재에 닻을 내렸다. 퀘렌시아에서 자신을 정비한 다음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지금 내가 마주한 사람과 지금 내가 처한 장소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왜 이것을 이제야 알았을까.
<유명현(동시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