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여성의창] 오늘 나는 바지에 똥을 쌌다

2019-07-20 (토) 신선영(UC버클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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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부인도, 기저귀 차는 것을 깜빡한 아이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20대 여성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이십 대 여성답게 앞으로 풀어나갈 매우 흥미롭지 못한 이야기에 억울해 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의미에서 저 자극적인 첫 문장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래 설명은 흥미롭지도, 정교하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여느 때처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고통은 조금씩 거세졌고 “설마” 하는 안일한 생각에 끝내 집 앞 정류장 벨을 누를 때가 돼서야 문제가 꽤나 심각했음을 인지했다. 버스 문이 끝까지 닫히는 것을 보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거사를 치러야 했다.

그날, 나는 전적으로 통제 하에 있었다. 아침 일찍 아치 모양의 눈썹을 그리고 적당히 빨간 색조의 립스틱을 입술 안쪽부터 발랐으며 큰 키를 강조해줄 통굽을 신고 거리를 활보했다. 헤이즐넛 라떼 향을 음미하며 바쁜 업무를 소화했다. 대학 친구를 만나는 저녁 식사 중에도 일상적인 수다에 정치 및 시사 이야기를 곁들이며 상대가 나를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확신했다. 오늘 밤은 그 친구가 나를 생각하며 적당한 질투와 동경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히게 될 거라고. 그때까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하루의 마무리가 고작 화장실에서 쭈그려 앉아 코를 틀어막고 변으로 얼룩진 바지를 문지르는 것일 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저자는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의 죽음을 세기의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으로 소개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인들과 변소를 공유했던 야코프는 그가 변소를 항상 더러운 채로 내버려둔다는 영국인들의 모욕을 견디지 못해 고압 철조망에 달려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똥 하나 치우는 것이 자존심 상해 “내가 누군데!” 하고 씩씩거리다가 죽어버린 불쌍한 영혼이다.

아무리 힘을 주고 살아간들 다 똑같다. 먹고 자고 싸는 아주 단순한 일에 인생이 바뀌기도 하고 생각보다 너무 사소한 것에 마음이 토라져 오랜 인연을 끊기도 한다. 하물며 똥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존재의 이유가 얼마나 대단할 수 있겠으며 좀 더 나은 인간이 있다 한들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우리는 오늘도 사소한 것에 우월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먹고 싸는 것을 반복하며 존재한다.

<신선영(UC버클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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