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iting //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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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oul waits for the Lord
more than watchmen for the morning.
내 혼이 주님을 기다리나니,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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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말티즈(Maltese) 견공(犬公)으로부터 늘
배웁니다. 무소유를 배우고 무착(無着)을 배웁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다만 지금/여기 오늘에
전념하고 순간을 만끽(滿喫)하는 걸 배웁니다. 따로
소일거리를 찾아 오락을 즐기지 않으며, 특별한
기호(嗜好)나 사치에 무관심함을 배웁니다. 그리고,
요즘은 특히나 녀석의 꾸준한 ‘기다림’ 속에 숨겨진
신비를 배우는 중입니다.
방금 오피스에서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건만,
어느새 집 대문 쪽을 향해 곧 돌아올 주(主)님을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올 줄 압니다. 굳게 믿죠.
늘 그렇게 돌아오는 주인과 늘 그토록 반갑게
상봉하는 것.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또한 그렇듯
내일도 여전히 계속되는 드라마. 뻔히 돌아올 줄
아는 주(主)님. 그럼에도 늘 기다립니다. 알지만,
그래도 기다립니다. 마치, ‘기다림’ 속에 뭔가
독특한 비밀이라도 숨어 있다는 듯이.
알고 보면, ‘기다림’이 곧 길(道)이요 진리? 딱히
답이 없는 구름 잡는 질문들. 철학이나 이성으로
풀기엔 지극히 애매한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사는가?
죽음 뒤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가? 깨달음이란
따로 있는가? 구원(救援)이란? 신은 존재하는가?
믿음[faith]이란 무엇이고 왜 믿어야 하는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은 진실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든 형이상학적 의문들의 답은 다만 ‘가다림’ 속에
숨겨져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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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oul waits for the Lord
more than watchmen for the morning.
내 혼이 주님을 기다리나니,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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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승(禪僧)들이 오래 앉아 가만히 참선하는 중에
얻는다는 어떤 깨달음. 어떤 이는 평생 앉아 봐도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데, 어떤 이는 앉자마자 불과
몇 달만에 오도송을 읊는다네요.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고 인연이 다르다지만, 알고 보면 ‘기다림’의
속내가 관건이더라? 그저 앉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
앉아 ‘기다림’의 절실함이 바로 답이더란 것. 그래서,
“쵀탁동시(?託同時)”라 하지 않던가.
예정된 수난을 겪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십니다. “ ...... commanded them that
they should not depart from Jerusalem, but
wait for the promise of the Father.” {Act 1:4]
‘기다림’을 명령하신 거죠. 가만히 한마음으로
기다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어지리라!
체험적으로 깨달아 얻는 걸 따로 증득(證得)이라
하지요. 사실, 증득되지 않은 알음알이는 헛지식에
다름 아닌 법. 그리고, 증득된 앎은 사람의 언어나
이성의 경계를 초월하기에 함부로 전하지도 못할
매우 신묘한 진리.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微笑),
그 미묘하기 그지없는 미소라야 겨우 증득된
진리의 편린이나마 간신히 전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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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oul waits for the Lord
more than watchmen for the morning.
내 혼이 주님을 기다리나니,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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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시편[Psalms] 130:6. 파수꾼들이 밤새
기다리는 아침보다 내가 주님을 더욱 지성(至誠)껏
기다린다는 고백.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체험으로
깨닫고 있는 겁니다, 시편 기자는. ‘기다림’ 속에
이미 답이 들어 있음을 익히 꿰고 있는 것. 깨닫고
보니, 오로지 ‘기다림’만이 성숙된 인연으로 다가오는
은총의 가호(加護)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
방금 헤어진 주님을 벌써 지성으로 기다리는 견공.
곧 돌아올 주님을 그래도 애써 기다리는 저 진지함.
전혀 꾸밈없는 그저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 사람들은
애써 피하는 이런저런 기다림을 굳이 즐기는 수준으로
만끽하는 견공의 직관: “기다림” 속에 답이 있느니라.
이미 그걸 체득한 견공의 일심(一心) 삼매. 그렇게,
오늘도 한 수 배웁니다, ‘기다림’의 미학을.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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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 영어서원 백운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