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폭도와 주먹밥

2019-05-18 (토) 박미경 뉴욕지사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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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되가 집구석에 변변히 없었어. 헌데 도청 앞에 가보니 얼척도 없고, 적십자 병원에 가본께 나살려라, 뭐해라 말도 못해. 해서 쌀을 걷으러 다녔지. 우리집서 밥을 해갖고 통구루마에 싣고 금남로에 가서, 요놈이나 먹고 해라 했지. 헌데 주먹밥도 제대로 못 싸. 학생이고 시민이고 배고픈께 금방 없어져버려.”

유공자도 아니고 기록조차 없지만 그날의 기억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오월애’는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 갖다주었던 양동시장 김씨 아줌마, 열여섯 미순이 그리고 도청 취사조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시민군들에 밥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아직 어린 여고생들, 가톨릭 노동자, 여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진압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도청 밖으로 보내졌지만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자진해서 도청으로 모여 마지막까지 시민군과 함께 항거했다.


그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름과 주소를 쪽지에 적어 주머니에 넣고 항쟁을 했다. 혹여 누가 자신들의 주검을 발견하면 가족에게 신원을 알려주라고. 하지만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리어 죄책감과 미안함에 가슴 적시며 살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프다고 한다. 양동시장 김씨 아줌마는 그때 일을 ‘암’이라 한다. 아파서 말도 못 꺼내는… 그래서 죽을 때까지 말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생활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들. 가진 것 없어도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 주었던 사람들. 홍성담의 판화 오월에는 그날 광주를 지켜냈던 시민들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다. 군부의 총, 칼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냈던 평범한 얼굴들이 있다. 그 중에 한 손에 횃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며 지나는 끝없는 행렬 가운데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지나는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이 광주의 이름 없는 주먹밥 아줌마들이다. 주먹밥 아줌마는 5.18의 상징으로 희생, 나눔, 대동 정신을 담고있다.

압살된 항쟁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격렬한 투쟁과 항거 속에 살아남은 자들은 정쟁으로 왜곡되고,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폭도들이고 괴물인 것이다.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한 자들은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고, 심지어 회고록까지 쓰며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 발포 명령자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북한 특수군이 일으킨 게릴라전이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날의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보상 많이 받지 않았냐’고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요란한 행사가 이어진다. 국가의 이름으로 학살하고, 국가의 이름으로 기념하는 5.18. 세월 속에 많은 사람들에 잊혀져가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역사에 빚진 자들이다. 주먹밥 한 덩어리에 힘을 얻고 목숨 바쳐 지켜낸 민주주의. 그 오월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때이다.

<박미경 뉴욕지사 부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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