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메디케어 포 올’ 의 현실

2019-05-09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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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약값에서 보험료에 이르기까지 매년 폭등하는 의료비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서민들에게 ‘메디케어 포 올(Medicare for All)’은 꿈같은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정부보험에 들어가 보험료, 디덕터블, 코페이먼트 등 내 돈 한 푼 내지 않고 기존의 의료서비스는 물론이고 치과, 안과, 정신과, 장기요양까지 거의 완벽한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다지 않는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급진적 주장으로 민주당에서도 외면당했던 이 헬스케어 개혁안이 2020년 대선의 핫이슈로 달아오르고 있다. 2016년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의 외로운 ‘소수의견’이었던 메디케어 포 올은 이제 샌더스를 선두로 엘리자베스 워런, 카말라 해리스, 코리 부커 등 민주 대선주자들이 공개지지를 선언한 주요 쟁점으로 중앙무대에 들어선 것이다.

지난 2월 말엔 연방하원에서 프라밀라 자야팔 의원이, 4월 초엔 상원에서 샌더스 의원이 각각 메디케어 포 올 법안을 상정했고, 지난주엔 첫 관련 청문회가 하원 의사운영위에서 열렸다.


가까운 장래에 ‘메디케어 포 올’의 입법가능성은 솔직히 제로에 가깝다. 민주당 내 지지가 상당히 늘긴 했지만 아직은 하원의 본회의 표결 회부조차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개혁안을 둘러싸고 급진파와 온건파가 맞서는 당내 분열이 가시화되면서 진지한 논쟁은 불가피해졌다.

도대체 ‘메디케어 포 올’은 무엇인가. 기본 컨셉이라도 정확히 알아야 찬반 의견의 개진도, 이에 따른 내년 투표의 방향 결정도 가능해진다.

65세 이상 노인과 일부 장애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인 메디케어는 가장 인기있고 성공적인 연방정부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이 메디케어를 전 국민에게 확대해 모두가 정부운영 보험에 가입토록 하는 것이 기본 아이디어다. 그러나 단순한 확대 적용은 아니다.

“메디케어 포 올은 메디케어가 아니다”란 지적이 나올 만큼 새 법안은 메디케어 자체도 대폭 개조한다. 현행 메디케어는 가입자가 보험료와 디덕터블, 코페이먼트 등을 지불한다. 치과·안과·정신과·장기요양 등은 커버하지 않는다. 또 파트C를 통해 민간보험 플랜 가입도 가능하다.

‘메디케어 포 올’이 실현된다면 민간보험은 없어진다. 약 1억8,100만명의 직장보험 가입자를 비롯해 메디케어·메디케이드·아동건강보험(CHIP)등 공공보험 수혜자와 오바마케어 통한 개인가입자, 무보험자 등 거의 모든 미국 거주민이 ‘메디케어 포 올’이라는 하나의 새 정부보험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재향군인과 아메리칸 인디언은 제외된다.

의료보험이 정부 독점사업이 되면 의사와 병원 등 의료제공자들에게 지불하는 가격도 통제될 것이다. 샌더스 플랜은 현재 민간보험이 지불하는 것보다 40%를 감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부담은 없어지고, 혜택은 늘어나며 의사를 바꿀 필요도 없다. 현행 민간 보험플랜은 각기 의사와 병원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가입자는 그 네트워크 내에서 의사를 택해야 하지만 단일화 정부플랜에선 네트워크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대가가 없을 수 없다. 세금이 상당히 인상될 것이다. 누구의 어떤 세금이 얼마나 올라갈지는 알 수 없다. 샌더스 플랜의 경우 시행 첫 10년의 경비가 약 32.6조 달러로 추산되는데 아직 구체적인 재원마련 방법은 명시되지 않았다.

샌더스는 ‘메디케어 포 ’올이 헬스케어 위기에서 미국인들을 구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사실 직장보험 가입자의 대다수가 만족하고 있다지만 그건 보험을 갖고 있다는 안도감일 뿐 급증하는 의료비 부담에 노후대비 저축이 날아가고, 매년 60만명이 의료비 때문에 파산하며, 2,800만명의 무보험자 외에도 8,500만명이 빈약한 보험 커버에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있다고 새 법안 지지자들은 지적한다.

‘메디케어 포 올’의 정치현실은 어둡다. 2014년 버몬트 주가 이와 비슷한 정부운영 싱글-페이어 헬스케어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다가 포기한 것은 높은 세금인상 없이는 재원을 마련할 수 없어서였다. 1990년대 민주당 백악관의 야심찬 헬스케어 개혁안이 민주당 의회에서 죽어버린 것은 기존 보험의 변화를 원치 않은 사람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메디케어 포 올’도 마찬가지다. 카이저재단의 첫 여론조사에선 56%가 지지를 표했다. 응답자의 60%는 자신의 기존 보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민간보험이 없어지고 세금이 인상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엔 지지율이 37%로 떨어지고 반대가 58%로 치솟았다.

민주당의 헬스케어 정책은 어느새 오바마케어를 넘어 메디케어 포 올을 기준으로 다듬어지고 있다. 대선 선두주자 조 바이든 등 중도파가 지지하는 대안에도 메디케어 가입 옵션이 포함되었다.

헬스케어는 2018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 이슈였다. 당시 ‘오바마케어 보호’로 단합하며 압승을 거둔 민주당이 2020년 대선을 앞두고는 ‘메디케어 포 올’로 분열하며 ‘안전’과 ‘혁신’ 중 어떤 메시지를 택해야 하나를 고심하게 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위대한 헬스케어의 정당”이라고 외쳤던 공화당은 어떤가. 고장 난 레코드처럼 “오바마케어 폐지”만을 반복하다 이젠 “사회주의 의료!”로 공격 슬로건을 허겁지겁 바꾸었을 뿐 헬스케어 개혁에 대한 아이디어나 의지는 여전히 보여주지 않고 있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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