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센서스‘시민권’질문의 속셈

2019-05-02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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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헌법 1조 2항에 명시된 센서스의 지침, ‘10년마다 각 주의 실제 인구 계수(Actual Enumeration)’는 센서스 실시 당시 미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카운트 되어야한다는 의미로 풀이되어 왔다. 시민이건 아니건, 불법체류이건 아니건, 어느 인종 어느 국적이건 상관없이 지금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 전부를 뜻한다.

연령·성별·인종·거주지역 등 다각적인 인구 동향을 숫자로 풀어낸 센서스 결과는 국가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 각 주의 연방하원 의석 및 대선 선거인단 규모와 연방기금 배당, 선거구 재조정이 센서스 통계로 결정되면서 비즈니스·교육·투표를 포함한 전 국민의 거의 모든 일상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센서스의 생명은 정확성이고. 정확한 집계는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가능하다. 엄청난 경비와 노력을 쏟아 부어도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기 힘든 센서스에 트럼프 행정부가 딴지를 걸고 나선 것은 지난해 3월이다. 이민자들의 참여를 감소시킬 게 분명한 질문 “미국 시민입니까?”를 서베이에 추가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시민권 질문이 처음은 아니다. 센서스를 실시해온 지난 200년 동안 넣다 뺏다하며 우여곡절을 거쳤다. “21세 이상 남성 시민이냐” “그 집에 귀화하지 않은 백인이 몇 명 있는가” “외국태생 귀화시민이냐” 등의 질문을 응답자 전부에게 혹은 일부에게 물었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묻는 것은 1950년 조사를 마지막으로 중단했고 2000년 이후엔 시민권 정보는 일부 가구를 대상으로 별도 실시하는 ‘아메리칸 커뮤니티 서베이’를 통해 수집하고 있다.

시민권 질문을 뺀 것은 이민자들의 참여를 늘려 센서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트럼프 행정부는 데이터의 질과 신뢰도를 해칠 수 있는 질문을 다시 추가하려는 것일까.

1980년에도 시민권 질문 추가 시도가 있었다. 반이민단체의 소송이었는데 제소자격 미달로 기각 당했지만 이 단체는 그래도 “불법이민 숫자를 밝혀 선거구 재조정에서 제외시키기 위해서”라고 이유는 솔직하게 밝혔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세운 이유는 치졸하다. 센서스를 관장하는 상무부의 윌버 로스 장관은 “투표권법 집행을 위해 보다 구체적 시민권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법무부 요청을 받아 추가했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법무부는 센서스에서 시민권 질문이 삭제된 후 10년이 지나 통과된 투표권법을 집행하는데 시민권 정보를 사용한 적도 없었다.

진짜 의도는 따로 있다. 공화당의 정치파워 강화다. 지난 10년 공화당의 힘은 2010년 중간선거 압승 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무리하게 재조정한 게리맨더링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달라지는 정치환경 속에서 앞으로 공화당의 게리맨더링 파워가 약화될 것은 분명하고 이를 우려한 트럼프 행정부가 찾아낸 대안이 센서스 개입이라고 USA투데이는 지적한다.

센서스에 시민권 질문을 포함시키면 자신이나 가족의 신분에 위협을 느낀 이민자들의 참여가 저조해지고 민주성향인 이민의 인구집계가 줄어들면 민주당 의석과 진보성향 주 및 로컬 정부에 대한 연방기금이 줄어들 것이라는 계산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 같은 반이민 조처에 반발한 일부 주정부와 민권단체들이 소송을 제기했고 소송을 담당한 연방판사들은, 다행히, “공화당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반트럼프 지역의 연방기금을 삭감하기 위해 기획된 정치파워 게임”이라는 행정부 속셈의 실체를 간파했다.


그러나 이민자들의 센서스 ‘운’은 연방지법에서의 승소, 거기에서 끝날 듯싶다. 최종 승부처인 연방대법원이 행정부 편에 설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도 오는 6월 센서스 대법 판결을 통해 트럼프가 ‘최대 정치적 승리’를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
재판의 쟁점은 질문 자체의 합헌성이 아니라 질문을 추가한 행정부 결정의 합법성 여부다. 상무장관은 센서스법에 의해 질문 추가를 포함한 재량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반대자들은 무분별한 독단적 방식으로 센서스를 집행하지 말도록 명시한 행정절차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한다. 이민자들의 참여를 위축시킬 수 있는 시민권 질문 추가에 반대한다는 센서스국 전문가들의 만장일치 결정을 무시하며 투명성과 책임의 기준도 위반했다는 주장이다.

대법원의 지난주 구두심리 분위기는 이념의 대립이 역력했다. 점점 강경 보수화하는 대법원에서 그나마 스윙보트의 가능성이 있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마저 시민권 질문이 투표권법 집행에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으니 5대4 판결의 시민권 질문 추가는 거의 확실해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 파워 플레이에 동조한다면 로버츠가 그처럼 강조해온 독자적 사법부의 권위는 추락할 것이다. 센서스의 정치화를 목격하며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보다 더 위태로운 것은 이민자들의 입지다. 센서스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있으면서도 없는,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두렵다 해도 맞서야 한다. ‘72년간 개인정보 공개 금지’를 명시한 센서스의 보호법을 믿고 더 적극 참여하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 속셈을 넘어설 수 있는 효과적 대응이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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