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금, 이 순간!

2019-04-19 (금) 민병임 논설위원
작게 크게
겨우내 얼어붙었던 흙속에서 노란 수선화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보랏빛 히아신스가 단아한 몸매를 드러내면서 봄이 왔다. 이즈음이면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는 타샤 튜더의 정원이 생각난다.

타샤 튜더(Tasha Tudor, 1915~2008)에 관한 책은 오래 전에 본 적이 있지만 작년 가을에 개봉된 타샤 튜더 다큐멘터리는 최근에 보았다. 버몬트 숲속에서 장작 난로, 고풍스런 19세기 식 집에서 코기 개와 정원을 가꾸며 사는 소박한 삶, 91세 타샤 튜더의 생전 인터뷰가 담긴 다큐멘터리는 느릿하게 진행된다.

동화 작가이자 삽화가인 튜더는 93세로 사망하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1915년 보스턴 명문가에서 출생했으나 9세때 부모의 이혼 후 시골생활이 좋아서 커네티컷의 어머니 친구집에서 기거했다. 결혼하던 해인 23세에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뉴 햄프셔 주 농장에서 2남2녀를 낳아 키우며 젖을 짜고 닭과 오리, 양과 돼지를 키우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도회적인 남자였던 남편과 이혼 후 네 아이를 키우고 30만여평에 이르는 정원을 가꾸며 얼마나 힘들고 바빴을까.

지난겨울에는 한국의 언니가 “모지스 할머니 그림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한 점 있다는데 혹시 가게되면 사진 찍어 보내달라”는 전화를 했다. 교사로 퇴직한 후 취미로 그림을 배우는 언니는 모지스 할머니 그림은 거의 다 찾아보았는데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단 한 점 있다는 그림 ‘터키’는 찾아볼 길이 없다고 했다.

기자는 미국의 국민화가 모지스( Moses, 1860~1961)에 대해 잊고 있었다. 원래 이름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사람들은 할머니라는 말을 붙여 ‘그랜마 모지스’ 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시골에 사는 평범한 주부로 76세에 처음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린 것이 101세까지 1,600점의 그림을 남겼다.

생전 교육을 제대로 배운 적도, 그림을 배운 적도 없으면서 지난날 미국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겹고 섬세한 그림을 그려냈다. 전화를 받은 바로 그 주말에 메트뮤지엄으로 가서 어렵게 3층 상설유리관 꼭대기에 걸린 모지스 할머니의 ‘터키’ 그림을 찾아내어 참 기뻤다.

모지스 할머니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2살 때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갔고 결혼 후 10명의 아이를 출산했으나 5명을 잃었고 남편이 병을 얻자 뉴욕근교로 거처를 옮긴다. 남편 사망, 딸과 막내아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좋았던 추억을 하나둘씩 그림으로 옮겼다. 1938년 미술품 수집가 루이스 칼도어가 길거리 약국에 걸린 그녀의 그림을 발견, 맨하탄 화랑가에 전시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타샤 튜더와 모지스, 두 할머니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그림을 많이 남겼다. 기뻤고 슬펐고 죽음조차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한시도 소홀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타샤 튜더는 “인생에 있어 지름길은 찾지 말라, 가치 있는 일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 “불행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 매순간 보고 느끼며, 즐기며 살자.”고 말했다.

모지스 할머니는 “내 일생은 충실히 보낸 하루와 같았다.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다. 나는 어떤 것도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고 주어진 삶을 최대한 잘 살았다.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

두 할머니의 말이 비슷하다. 아픔도, 상처도 어느 누구 못지않게 많이 겪었지만 그림으로, 수공예품으로 불행을 승화시켰다. 그래서 두 할머니는 모두 자신의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활기를 띄고 움직일 때다. 일상이 너무 바빠 자신도 모르게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 더 이상 소중한 것을 놓쳐서는 안되겠다. ‘잔잔한 물과 같은 삶’을 살고 간 타샤 튜더, 76세에 그림을 시작한 모지스 할머니처럼 아직 젊은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귀기울여 보자. 바로 지금이 가장 고마운 시간이라지 않는가.

<민병임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