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한민국의 국격은 어디 갔는가?

2019-04-18 (목) 신기욱 스탠포드대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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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격은 어디 갔는가?

신기욱 스탠포드대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 소장

지난 11일 낮 12시 10분,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백악관에 도착했다. 곧이어 오벌 오피스로 자리를 옮긴 한미 정상은 당초 15분으로 예정되어 있던 단독회담에 앞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방송 카메라에 둘러싸인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발언을 하고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하는데 27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두 정상이 ‘진짜’ 비공개 단독회담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은 2분 남짓, 그 마저도 자리를 정돈하는데 써버리고 말았다. 지난해 5월 정상회담 때도 문 대통령을 옆에 둔 채 34분간 기자들의 돌발 질문을 독식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데자뷰를 보는 듯 했다.

더구나 기자회견 동안 이번 회담의 주요의제인 북한 비핵화에 대한 심도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미국산 무기 구매에 대해 감사표시를 여러 번 반복했고, 위키리크스의 줄리안 어산지 체포와 로버트 뮬러 특검의 보고서, 당시 열리고 있던 매스터스 골프대회 우승 예상자에 대한 언급에 아까운 시간을 할애했다. 아무리 그의 격식을 벗어난 언행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방문국 정상내외를 면전에 두고 이런 식의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외교결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의는커녕, 웃는 모습을 보여야 했던 문 대통령을 보면서 가슴이 편치 않았던 것은 필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귀국한 다음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 인민회의 발언에서 문 정부를 향해 대놓고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일갈 했다. 한국의 국격은 사라지고 동네북이 된 듯한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이러한 상황은 한국도 이를 자초한 책임이 있다. 이번 방미 자체가 한국정부에 의해 너무 성급하게 추진되었고 사전 준비나 회담의 의제 설정 등에도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하노이 북미 회담이 결렬된 이후 대북정책의 모멘텀을 살리고 한미동맹의 균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긴밀한 사전 조율도 없이 정상간 오찬회담이나 하려고 1박3일의 워싱턴 일정을 강행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북한의 비핵화를 놓고 트럼프 대통령과 단둘이 허심탄회한 논의를 해도 부족한 마당에, 국무장관, 안보보좌관, 부통령을 따로 만나는데 오전 시간을 할애하고 막상 정상 간 단독회담은 15분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찬 시간을 내어준 것에 불과한 모양새, 그리고 회담 전후 미 언론의 관심도 적었던 것을 보면 이번 방미는 미국 측에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상 간 만남 자체가 중요할 수 있지만 치밀한 사전준비가 없으면 오히려 안한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운전자, 중재자, 촉진자로 자처하면서 어정쩡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김 위원장의 말처럼 한국은 중재자가 아닌 이해 당사자이며,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한국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포지셔닝을 확고히 해야 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도 문 대통령이 좀 더 확고한 입장을 갖고 트럼프 대통령과 논의를 하기를 바랐지만, 공동성명이나 회담결과에 대한 공동기자회견도 없이 한미 양국이 북한 비핵화의 ‘엔드 스테이트’에 의견 일치를 봤다는 청와대의 외교 수사적 발언으로 막을 내렸다.

미국과 북한의 태도에서 “우리끼리 직거래를 하고 있으니 문 정부가 자꾸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음마저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문 정부가 하노이 회담 전 영변 핵폐기와 제재해제, 남북경협, 종전선언 등 섣부른 발언으로 북한이 오판을 하도록 도운 측면이 없지 않다. 이제 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이해 당사자로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고 김정은 위원장을 설득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손상된 대한민국의 국격과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기욱 스탠포드대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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