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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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추억

2019-04-06 (토) 12:00:00 이승희(섬유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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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문득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갔던 교토 여행의 기억이 떠오른다. 단풍이 한창이던 11월 초의 교토는 고즈넉한 옛 도시의 풍광과 시끌시끌 관광지의 풍경을 다 가지고 있었다. 단풍이 예쁜 청수사나 게이샤들이 짝을 지어 걸어 다니는 기온 거리도 참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치쿠린이라는 대나무 숲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침 일곱 시, 이른 시간에 도착한 치쿠린에는 바람소리와 그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치는 대나무들의 소리 그리고 새들의 지저귐만이 가득했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대나무 숲 사이를 남편과 둘이서 한참을 걸을 때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참 따스했었다. 그때를 기억하면 가슴에 그 따뜻함이 몽글몽글 올라온다. 돌이켜보면 그 여행 중에 우리는 정말 많이 다퉜고 오래 걸어 다녀 발은 아팠으며 숙소도 좁아 불편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억은 사라지고 좋았던 시간, 아름다운 경치들만 생각이 난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 안에 침식돼 조약돌처럼 맨질맨질해진 ‘추억’이라는 이름의 구슬로 남는다. 힘든 기억은 빛나는 시간의 모래 속으로 퇴적되어 사라지고 구슬 안에는 행복했던 추억만 남는다. 가슴 한구석에 잘 넣어둔 추억은 들여다볼수록 더 반짝이고 더 빛이 난다. 구슬을 하나씩 꺼내어 볼 때마다 따스한 기억의 담요를 어깨에 두른다.


멍하게 앉아 혼자만의 동굴에서 추억의 구슬을 꺼내 보기를 즐긴다. 가끔 기억이 추억이 되는 과정에 약간의 과장이 더해지기도 하지만 뭐가 어떤가. 나 혼자만의 추억이니 누가 뭐라 할 일도 없다. 구슬을 들여다보며 돌아가신 할머니의 함박웃음을 보기도 하고 다니던 학교의 교정을 다시 한번 걸어보기도 한다. 그 안에서 나는 다시 아이가 되기도 하고 젊으셨던 부모님을 만나기도 하고, 지금은 소식이 끊겨버린 옛친구도 본다. 퇴적돼버린 힘들고 아픈 기억들은 시간의 모래 속에서 내 안의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그 위에 하루하루 새로운 기억이 생기고 추억도 더해진다. 그저 기억만으로 간직해야 할 오래전 추억들은 아빠의 책장 속 빛바랜 앨범처럼 가슴 한편에 나란히 서있다.

지나간 시간들은 늘 그리움으로 남는다.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돌이켜보며 오랜 시간 미소를 짓게 만든다. 어제의 추억을 딛고 오늘의 내가 내일을 기대한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다.

<이승희(섬유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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