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참혹한 전쟁이 지나간 땅, 그 피·땀·눈물을 기억하다 (경북 칠곡군)

2019-03-15 (금) 글·사진(칠곡)=우현석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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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칠곡군을 찾은 다음 날 아침 취재를 나서려고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우산을 들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손이 모자라 애초에 비를 가릴 도구는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카메라를 외투로 감싸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와중에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옷이 금세 젖었다. 날씨는 포근했지만 옷이 젖으니 턱이 덜덜 떨렸다. 긁어모을 글감이 있는지 궁리하는 와중에 칠곡군 곳곳에 들어서 있는 전적 기념관들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로 들른 다부동의 전적 기념관에서 얻은 칠곡군 관광안내 책자에는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군’이라고 인쇄돼 있었다. 글귀처럼 한국전쟁 중 다부동에서는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왜관읍 석전리의 303고지~석적읍 포남리 328고지~석적읍 망정리 숲데미산~석적읍 성곡리 유학산 일대를 잇는 방어선에서는 고지전이 거듭됐다. 특히 유학산은 아홉 번, 328고지는 열다섯 번이나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전의 무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839m의 유학산에 야포를 방렬하면 대구 시내가 사정권에 들어와 양측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사활을 건 격전을 벌였다. 특히 1950년 8월18일부터 25일까지 아홉 차례의 공방 중 아군 측이 하루에 신규 병력 700여명씩을 투입했을 만큼 희생이 컸던 곳이다. 다부동 전투는 9월24일 천생산 진지를 탈환할 때까지 55일 동안이나 계속됐고 사상자 숫자는 북한군 2만4,000여명, 국군이 1만여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이 투입한 3개 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13사단은 궤멸 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대 이후 유학산 일대 수색에서 유골 및 전쟁유품들이 다수 발견됐다.


칠곡 호국평화기념관은 일대 전적 기념관 중 규모가 제일 큰 곳이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만에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렸고, 국군과 미군의 방어선이 만나는 취약지였다. 낙동강의 하류는 미군, 상류는 한국군이 맡아 지켰는데 인민군은 그 사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게다가 칠곡은 대구로 진출하는 길목이어서 인민군은 모든 화력을 이곳에 집중했다. 당시 미8군 사령부를 비롯한 주요 지휘부와 병참시설은 대구에 집중돼 있었다. 이곳에서 55일간 전투가 벌어진 이유다. 이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칠곡군은 호국평화기념관을 4년 전인 2015년 완공했다.

2008년 정부 시책사업의 일환으로 보훈처가 낙동강 호국 평화벨트 조성을 결정, 1차 사업으로 칠곡·영천·상주·영덕이 선정됐다. 상주는 지난해 개관했고 영덕과 상륙작전이 감행됐던 장사해변에도 기념관을 추진 중이다. 기념관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전차전과 4차원 입체영상을 볼 수 있는 가상현실(VR) 체험관까지 마련돼 있다.

왜관지구 전적 기념관은 칠곡군 석적읍 중지리 산 33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왜관 전투가 유명해진 것은 왜관철교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1950년 8월1일 워커 중장은 이 일대에 ‘워커라인’을 설정했고, 8월3일 왜관 주민 소개령이 내려졌다.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들이 8월4일 새벽 모두 폭파되면서 왜관 인도교도 함께 폭파됐다. 8월16일 인민군 4만여명이 대규모 도하작전을 강행하자 워커 중장은 맥아더사령부에 융단 폭격을 요청, 일본에서 발진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방 67㎢에 26분 동안 960톤의 폭탄을 쏟아붓는 융단폭격을 단행했다. 이 폭격으로 인민군 4만명 중 3만여명이 폭사했다.

이처럼 아픈 추억을 간직하고 곳이 왜관 인도교(구철교)와 자고산(303고지)이다. 인도교 폭파구간은 1950년 10월 침목 등으로 복구한 후 이용하다가 노후화로 1979년 11월부터 통행을 전면 중단했다. 왜관 철교는 도비 4억원, 군비 2억원을 들여 1993년 2월26일 완공한 후 ‘호국의 다리’로 명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글·사진(칠곡)=우현석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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