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메디케어 전쟁’

2019-03-14 (목) 박록 고문
작게 크게
2016년 대선 캠페인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거듭 강조한 공약은 국경장벽 쌓기만이 아니었다. 출마 직후 “내가 소셜시큐리티,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삭감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첫 번째이자 유일한’ 공화당 대선 주자”라고 선언했고, 캠페인 내내 “난 다른 공화당 후보들과 다르다”면서 메디케어 등의 보호를 천명했었다.

그러나 11일 공개된 트럼프 대통령의 2020년 예산안은 향후 10년 동안 메디케이드 1.5조 달러, 메디케어 8,450억 달러, 소셜시큐리티 2,500억 달러의 대폭 삭감을 포함하고 있다. 그 ‘보호’ 공약이 깨진 것이다.

대통령 예산안의 운명은, 워싱턴 식으로 표현한다면, 의회에 ‘도착 즉시 사망(Dead On Arrival)’으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산 입법권이 전적으로 의회에 속해 있어서다. 행정부의 새 회계연도 우선과제 희망사항을 적어 의회에 제출한 대통령의 예산안은 일종의 참고자료, 혹은 출발점인 셈이다. 금년처럼 양원 중 하나라도 야당이 주도권을 갖게 되면 대통령 예산안의 영향력은 더욱 줄어든다.

역대 최대 규모인 4.7조 달러의 이번 트럼프 예산안도 입법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하다. 행정부의 국정방향을 시사하는 청사진이라는 전통적 의미도 있지만 트럼프 예산안의 경우, 또 다시 정부 셧다운을 불사하는 치열한 예산 투쟁의 시작이자, 2020년 대선 캠페인의 뜨거운 이슈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주요 공약 불이행이 드러난 마당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지켜진 약속’이란 부제가 달린 이번 예산안의 칼날은 거의 모든 사회안전망을 겨냥하고 있다. 부유층과 대기업에 대폭 혜택을 준 감세로 더욱 악화된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단행하려는 대폭 삭감 대상엔 푸드 스탬프, 학자금 대출, 주거 지원 등 사회 취약계층이 기대고 있는 많은 복지프로들도 포함되었다.

비국방예산을 9% 줄이고 국방예산을 5% 늘리는 한편, 의회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다시 86억 달러나 되는 장벽예산을 배정하고 있다.

공화당 상원은 주례 기자회견에서 언급조차 안하면서 외면했고, 발 빠르게 러스 보트 백악관 예산국장대행을 불러 청문회를 가진 민주당 하원에선 비난이 쏟아졌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성명을 발표했다 : “부자들을 위한 공화당 택스 사기로 2조 달러 적자를 늘린 트럼프 대통령이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에서 2조 달러를 털어가려 한다. 비효율적이고 돈 낭비인 장벽에 수십억 달러를 요구하면서 학생들과 굶주린 가족, 농촌지역과 농부들의 몫을 훔쳐가려한다…”

만약 시행된다면 메디케이드 등 저소득층 수혜자에게 미칠 영향은 상당히 심각할 것이다. 이에 비해 노인들의 의료보험인 메디케어에 대한 영향은 좀 복잡하다.

예산안이 공개되자마자 의료계에선 “노인들에게 재난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터져 나왔지만 보트 예산국장대행은 즉각 “수혜자에게 영향을 주는 메디케어 ‘삭감’이 아니다…처방약값 인하와 낭비, 사기와 남용 적발강화 등 메디케어 ‘개혁’ 추진이다”라고 반격을 가했다.


메디케어 삭감을 언급하면 우선 혜택 축소를 상상한다. 수혜자에 대한 커버는 줄고 개인의 부담은 늘어날 것으로 걱정한다. 백악관은 이번 삭감의 85%는 병원과 의사 등 의료제공자에 대한 지불에서, 나머지는 처방약값 인하와 남용 단속 등으로 커버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다 해도 이 과정에서 수혜자에게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가 메디케어 삭감을 원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벌써 ‘메디케어 삭감’은 2020년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새로운 공격 대상으로 떠올랐다. 카말라 해리스는 “노인들에게 해를 끼칠” 트럼프의 예산안이 “새 대통령이 필요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트윗했으며, 조 바이든은 한 강연에서 “거의 1조 달러에 달하는 메디케어 삭감을 왜 하느냐고? 1.9조 달러 수퍼부자 감세로 인한 적자를 누군가에게 메우도록 해야 하니까”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메디케어 삭감은 2012년 대선 때도 핫이슈였다. 오바마케어 통과 후 예산적자를 늘리지 않기 위한 대책의 하나가 의료제공자에 대한 지불을 깎는 메디케어 대폭 삭감이었는데 당시 민주·공화 양당의 입장이 지금과는 완전 반대였다. 공화당은 노인들을 위험에 처하게한다고 비난했고 민주당은 수혜자 피해는 없다고 강변했다. 정치의 속성이다.

당시 트럼프도 삭감을 비난하는 트윗을 날렸다 : “메디케어 기금 깎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그의 이름은 버락 오바마” 그랬던 그가 이젠 그 ‘한 명’이 되어 쏟아지는 벌떼 공격을 방어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메디케어 등 헬스케어 삭감은 언제나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공격목표가 되어 왔다. 민주당이 전국민 의료보험을 상징하는 ‘메디케어 포 올’로 메디케어 확대를 포용하는 현 시점에선 특히 그럴 것이다.

입법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트럼프 예산안으로 2020년 대선을 향한 ‘메디케어 전쟁’의 첫 총성은 이미 울린 듯하다.

<박록 고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