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20 트럼프’ 예고편

2019-03-07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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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트럼프! 트럼프!” “USA! USA! USA!” “4년 더! 4년 더! 4년 더!”

무대 한쪽에 세워진 대형 성조기를 껴안으며 등장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열광하는 환호는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워싱턴 근교에서 열린 보수주의자들의 최대 연례모임 ‘보수정치행동회의(CPAC)’ 2019년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지난 토요일 트럼프의 스피치였다.

‘노 딜’로 결렬된 북미정상회담, 전국에 생중계된 마이클 코언의 폭탄증언, 자신의 국가비상사태 선포에 맞선 의회의 저지 결의안…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몸도, 마음도 지쳐 하노이에서 귀국한 그가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에 달려간 보람을 만끽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민주당과 뮬러 특검, 미디어와 기성 정치인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는 비판과 조롱, 끊임없는 자화자찬으로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즉흥적 연설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화답하는 붉은 모자 물결의 그곳은 트럼프에겐 그야말로 무풍지대였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인종주의자!’ 충격적인 코언의 고발도, 북한과의 협상 실패 책임도, 트럼프 백악관을 위기로 몰고 가는 러시아스캔들 수사도 ‘다른 세상’인 그곳에선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나흘 간 계속된 금년 행사에서 “연사들은 너도나도 트럼프를 ‘이 나라의 구세주’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찬양했다…영웅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한 트럼프는…점점 더 극우로 기울어지는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라고 블룸버그 뉴스는 현장의 분위기를 전했다.

대선주자들의 불꽃 튀는 경쟁, 정통보수파와 새로운 극우파 간의 알력 등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던 예년과 달리 9,000명이 참석한 금년 CPAC은 강연장에도, 토론회에도 ‘단합 무드’가 역력했다. 더 힐은 “트럼프 대통령과 20여명 공화 상원의원들이 재선을 치러야 하는 2020년을 향하며 공화당이 준비하는 캠페인 작전의 예고편”으로 비유했다.

두 가지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사회주의’와 ‘트럼프’ - 연사들마다 매도한 ‘민주당 사회주의’와의 투쟁이 2020년 대선 캠페인의 주요 메시지로 떠올랐고, 잠재적 경선 도전자들에 대해 위협적인 경고까지 서슴지 않는 ‘1,000% 트럼프 지지’가 확연했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빈번히 들린 단어의 하나는 ‘사회주의’였다. 연사들은 잇달아 “민주당 후보들이 밀고 있는 사회주의가 우리의 국가와 경제와 일상과 미래를 파괴하려 하겠지만 트럼프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번 선거는 공화당 민주당에 관한 게 아닌, 사회주의와 자유시장에 관한 것”이라고 케빈 매카시 하원 공화당 대표는 경고했고,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은 “사회주의를 심판대에 세워야한다”고 촉구했으며, 로나 맥대니얼 공화당 전국위원장은 “우리가 사회주의 실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베네수엘라에 대해 알려주며 교육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국정연설에서 “미국은 결코 사회주의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트럼프도 이날 연설에서 “사회주의는 환경이나 정의, 미덕에 관한 게 아니다. 지배계급의 파워에 관한 것이다…미래는 사회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닌 자유를 믿는 사람들의 것이다…우린 사회주의 악몽이 아닌 아메리칸 드림을 믿는다”며 2020년 선거를 ‘사회주의와의 투쟁’으로 프레임했다.


소련붕괴 이후 ‘경제 실패와 정치 압제’의 대명사로 통했던 사회주의의 정의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전 국민이 무료 혜택과 서비스를 누리는 평등사회’로 이해되고 있지만 사회주의에 긍정적 시각을 가진 유권자는 18%에 불과하다. 보수층 결집뿐 아니라 무소속 표밭 공략에도 효과적인, 매우 강렬한 감정적 테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적색공포 전략’이라는 진보진영의 비난과 함께 일부 전략가들로부터 “만약 민주당이 이를 경시한다면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CPAC은 이제 트럼프의 TPAC으로 개명해야한다고 할 만큼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고 재선 승리에 대한 확신도 넘쳐났다. 경선 도전은 “돈 낭비, 시간낭비 후 끔찍하게 패배하고 정치생명 끝나는 가미가제가 될 것”이라는 원색적인 ‘저주’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하긴 이번 주 발표된 NBC/WSJ 여론조사에서도 공화당 유권자의 거의 90%가 트럼프 국정을 지지하는 등 보수표밭의 충성도는 여전히 확고하다. 내년엔 경기침체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 응답도 전체 유권자의 53%에 달했다.

공화당내 ‘저항’의 기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때 진지한 보수주의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 산실로 자부했던 CPAC의 트럼프 열광을 보며 좌절한 일부 보수 전략가들은 “공화당은 죽었다. 완전히 트럼프의 당이다”라고 개탄한다. 의회에서 트럼프 극단정책에 반기를 드는 공화의원들의 이탈표가 나오기도 한다. 큰손 보수기부가 코크형제의 2020년 트럼프 제동계획 소문이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지지 함성에 파묻혀 잘 들리지조차 않는다.

그 많던 반트럼프 인사들도 두 부류로 정리된 모양새다. 충성스런 지지자로 변신했거나, 보수진영에서 ‘파문’ 당해 일선에서 사라졌다.

공화당은 이미 트럼프 당의 길로 깊숙이 들어섰고, 트럼프 재선은 ‘기대와는 달리’ 크게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납득하기 힘들어도 그게 미국정치의 현재 기상도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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