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2019-03-07 (목) 조이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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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조이스 리 스탠포드대학교 아시아태평양 연구소 리서치 매니저

얼마 전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늦은 밤 술에 취한 한 중년남성이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다 급기야 두명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창 실랑이가 벌어지던 중 옆 벤치에 앉아있던 한 청년이 일어나 “그만 하세요” 라며 경찰과 취객을 떼어놓더니 갑자기 이 취객을 끌어안고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경찰 두명이 무력으로 제압하기도 버거워보이던 이 중년남성은 처음엔 놀라 뒷걸음을 쳤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가만히 청년의 품에서 흐느꼈다. “난동부리는 취객을 한방에 진압하는 멋진 일반인” 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영상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이 있다. 부드럽고 유한 것이 능히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으로, 어떤 상황에 대처할 때 강한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이기는 것 같지만 부드러움으로 대응하는 것에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는 아이를 달래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듯이, 뚝 그치라고 윽박지를수록 아이의 울음소리는 함께 커지지만 “ㅇㅇ이가 많이 속상 했구나” 하고 안아주며 토닥이면 아이는 금세 진정하고 울음을 그친다.

거친 운동으로 보이는 유도(柔道)의 ‘유’는 ‘부드러울 유’. 말 그대로 부드러움을 이용해 상대의 강한 힘을 제압하는 기술이다. 유도뿐 아니라 어떤 운동에서도 ‘힘 빼기’는 기본이다. 골프, 수영, 검도 할 것 없이 운동을 처음 배울 때면 “힘 빼세요”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다. 일반적으로 세게 치고 멀리 나가려면 힘을 세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부드러운 동작에서 가속도가 나오고 유연함에서 정확성이 나온다. 스포츠뿐 아니라 악기를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힘 빼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스포츠에서도 악기연주에서도 어렵지만 삶에서는 더욱 그렇다. 힘세고 목소리 큰 사람이 기선을 제압하고 더 독한 말로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힘을 빼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접촉사고의 현장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이웃과의 실랑이에서, 많은 경우 언성을 높여 강하게 주장하고 공격하는 사람의 의견이 관철되는 경험을 하면서 너도나도 더 강해지려, 지지 않으려, 얕보이지 않으려, 목소리에, 어깨에, 눈에 더 힘을 싣는다.

그러나 정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위협이나 강요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강압적인 제도와 타율에 의한 변화는 한시적이고 표면적인 변화에 불과할 뿐이다. 상대를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마음이다. 존중이고 이해이고 인정이다.

지하철역의 중년남성에게 필요했던 것도 무력과 공권력이 아닌 위로와 공감의 제압이었다. 협박도 위협도 무력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을 부드럽지만 강한 포옹으로 따뜻하게 진압한 청년의 모습은 약함의 강함을 보여주는 멋진 예였다.

세상에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하직원이든, 어린아이이든, 사회적 약자이든, 나에게 한없이 무례한 사람에게조차 강함으로 약함을 눌러야 마땅한 경우는 없다.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수용할 때, 진 것 같아 보여도 실질적으로 이기는 진정한 강함이 드러난다.

유연한 사고와 부드러운 자세는 편견과 차별을 밀어내고 새로운 관계와 치유를 위한 공간을 만든다. 인간의 행복은 주위 사람들과의 따뜻한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함께 나누고 즐거워하고 더불어 살아갈 사람들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우리 사회에 팽배한 강자와 약자, 갑과 을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마음으로 마음을 보듬는 부드러움의 힘이 발휘되는 사회를 꿈꿔본다.

<조이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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