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외손녀인 사만타가 지난 1월, 크리스마스 휴가가 끝나자 영국으로 떠났다. 그애는 그동안 캐나다의 제일 큰 섬인 빅토리아의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을 다니다가 영국 런던의 근교인 작은 사립대학으로 옮겼다. 그애가 떠나는 날, 우리 가족은 모두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나갔다.
그애는 떠나기 전 지 엄마를 비롯해 동생들, 또 나를 한번씩 꽉 포옹해 주고 몇발자욱 가다가 다시 뛰어 와서 우리들을 차례로 다시 한번 안아주고 떠나갔다. 사만타의 큰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고 남겨진 딸애와 두 꼬마까지 울음을 참느라고 벌개진 눈을 주먹으로 이리저리 닦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별은 늘 슬프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우리들은 수없는 이별을 하며 살아간다. 짧은 이별, 긴 이별, 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이별도 있다. 인생이란 이런 저런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며 차츰 성숙해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 한국 속담에 역마살이란 말이 있다. 그애는 바로 이 역마살을 타고난 것 같다. 애기 때부터 태평양을 몇번이나 오갔는지 모른다.
그애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1999년생이니 올해 갓스므살이 된다. 우리 딸애가 한국에 나와 함께 놀러 갔다가 캐나다 남자를 만났는데 그 남자가 바로 사만타의 아버지다. 잘 생긴 외모덕에 딸애와 사랑에 빠졌고 그들은 몇달 뒤 태국으로 날아가 결혼을 했다. 나와 남편도 참석치 못한 결혼이었다.
그 당시 딸애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한국에 주저 앉아 삼년을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사만타를 임신했고, 한 의사 말이 아이가 잘못된 것 같다고 해서 임신 중절까지 받으러 갔다가 딸애의 마음이 바뀌는 바람에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애다.
나는 가보지도 못하고 미국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딸애가 전화를 했다. ”엄마!만약 아기가 잘못된 아기라도 그애도 살 권리가 있잖아요? 그래서 마음을 바꿨어요” 딸애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엔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았지만 한편 생각해보니 딸애가 나보다 더 생각이 깊고 성숙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나는 딸애의 의사를 존중해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사만타는 태어났는데 낳고보니 멀쩡한 애기였다.
그애는 아기때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서 ‘어머! 이 애기 눈좀 봐! 어쩌면 이렇게 인형처럼 예쁜 애기가 있니?’하며 사람들이 감탄을 했다.
딸애는 일년 반 후, 사만타가 18개월이 됐을 때 그애를 안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나타났다. 다니러 온 것이 아니고 아주 미국에 돌아왔다고 딸애는 태연히 말했다. 그때부터 일년 간을 두 모녀는 우리 집에 함께 살았다. 또 딸은 곧 오클랜드에 있는 로펌에 들어갔고 자연히 애기는 내가 베이비시터를 해야했다.
몇달 뒤 그애는 현재 우리 사위를 만났고 그들은 그후 아이도 남매를 낳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미국이란 나라는 참 재미있는 곳이다. 이곳은 하도 이혼과 재혼을 밥먹듯 하는 나라여서 그런지 재혼한 부부가 많이 있어서 부부끼리도 유어 베이비, 마이 베이비, 아니 아워 베이비라고 부르며 그 호칭이 다양하다. 그들은 이혼한 사이라도 서로 왕래를 하고 사이좋게 잘 살고 있다. 우리 딸네도 마찬가지다. 사만타의 친 아빠가 가끔 캐나다에서 오면 제일 반가워 하는 아이들이 사만타가 아니고 두 꼬마들이다. ‘엉클 마커스!’하면서 매달리고 그렇게 좋아들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당황한다.
딸애는 태연히 사만타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사만타를 값싼 모텔에 보낼 수가 없어서 자신들의 집에서 묵게 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이다. 사위인 스티브도 그를 위해 맥주도 내오고 바비큐 스테이크도 만들어 주고 한다. 스티브는 내 딸보다 거의 십년이나 연상이어서 이해성도 있고 또 좋은 가정에서 자라서인지 성품이 넉넉하다.
지난 11월에는 우리 딸과 열살짜리 손녀딸인 데니엘과 나와 사만타를 만나기 위해 빅토리아섬으로 날아가서 함께 4박 5일을 잘 보내고 왔다. 호텔이 바로 바다 앞이어서 전망도 좋았고 매일 저녁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다. 우리 여자들만 삼대가 모여 좋은 추억도 쌓았고 실컷 호사를 했다.
나는 운명은 어느정도 믿지만 인생은 자신이 스스로 변화시키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극적인 사람은 소극적으로, 적극적인 사람은 적극적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적극적인 사람은 부지런히 자신이 움켜쥘 수 있는 최대한의 복을 차지하고 살 수 있다.
나는 요즈음 사십여년 전 이삼년 그리다가 만 그림을 나이 팔십이 되어서 다시 시작했다. 일년 동안 이십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 이 그림이 얼마나 잘그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것에 열중할 수 있고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노후의 삶이 즐거운 것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얼마전 나와 수십년 간 친한 메리라는 친구가 내가 선물한 그림을 좋은 그림틀에 끼어서 사진을 찍어 이메일로 보내왔다. 실제의 그림보다 더 멋있게 보였다. 메리는 거실에 걸어놓고 매일 그 그림을 보며 엔조이한다고 편지에 적었다.
이런 이메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내 영혼을 풍성하게 살 찌운다. 어느날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내 아들네 집에, 내 딸의 집에, 또 내 손주들 집에 그리고 친했던 친구 집에 내 그림이 한점이라도 걸려있다면 그들은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아마 미소를 지을 것이다. 나는 자식들에게 물질적인 유산은 남길 수 없지만 정신적인 유산은 남기고 싶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본 보야즈!이지만 슬프지 않고 행복한 안녕! 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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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