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분열’ 트럼프의 ‘단합’ 촉구

2019-02-07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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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연설 시작 전 대통령이 하원의장에 의해 소개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은 오래된 관례다. 민주정부의 권력분립을 존중하는 선의의 제스처이기도 하고, 특히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대통령의 경우 협상의 파트너가 될 야당 리더에 화합의 악수를 청할 기회이기도 했다.

2007년 조지 W. 부시는 낸시 펠로시를 향해 “여성 하원의장을 맞은 첫 대통령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찬사를 보냈고, 2011년 버락 오바마는 존 베이너 하원의장의 자수성가 스토리에 경의를 표해 베이너를 감동시켰다.

공화당 천하에서 안주하다가 막강 민주당 하원과의 대결이라는 새로운 정치환경에 처해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강적 펠로시 하원의장을 등 뒤에 둔 5일 밤의 국정연설은 낯선 경험이었다. 펠로시-트럼프의 미묘한 상호기류가 흥미로운 관전포인트의 하나로 꼽혔고 트럼프가 펠로시에게 보내는 치하가 열렬한 박수를 받을 ‘초당적 순간’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실수인지 고의인지, 트럼프는 펠로시가 그를 소개하기도 전에 연설을 시작해버렸다. 초당적 단합 촉구와 당파적 공격 사이를 수없이 오간 이날 연설의 상징적 순간이기도 했다.

단합 촉구, 치적 자찬, 초당적 타협이슈 제안, 강력한 낙태제한법 촉구, 반 이민 선동적 경고와 장벽 강행 의지 천명…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보는 듯 했다” “회유적, 전투적 두 가지 무드의 급선회를 반복하는 연설이 불확실한 2019년의 교차로에 선 대통령을 반영하는 듯 했다”란 미디어들의 해설이 잇달았다.

연설은 초당적 단합 촉구로 시작되었다. “우린 보복과 저항과 응징의 정치를 거부하고, 협조와 타협, 공동선의 무한한 가능성을 포용해야한다 … 미 정치의 새로운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잡을 용기만 있으면 된다 … 승리란 우리 당이 아닌 우리나라를 위해 이기는 것이다”라고 역설하며 ‘초당적’ 박수도 이끌어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자신의 경제치적을 자찬하는 뒤 끝에 이 같은 경제호황이 “터무니없는 당파적 조사로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고 민주당을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평화와 번영을 위한다면 러시아스캔들 조사들을 멈추라는 이 위협적 경고는 일부 공화의원들에게도 충격인 듯 했다.

다시 그는 지난 연말 초당적 입법화에 성공한 형법개혁 ‘첫 걸음법’ 수혜자들을 소개하며 긍정적 톤으로 급선회했고 처방약값 인하, 유급가족병가, 에이즈 퇴치, 소아암 치료 지원에서 낙후된 기간시설 재건에 이르기까지 민주당도 선호하는(그러나 양극화 정치기후에서 실제 입법화 가능성은 희박한) 이슈들에 대한 초당적 지지를 호소했고 후반엔 2차 미북정상회담 일정발표를 비롯해 시리아 철군 등 국제문제에서의 자신의 업적과 정책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트럼프가 국경안보 ‘위기’를 언급하면서 분위기는 급속히 경색되었다. 80여분 연설 동안 한 이슈에 대해 가장 길었던 15분을 할애하며 그는 범죄·마약·미국민의 임금저하 등 온갖 문제들을 초래하는 불법이민의 ‘악행’이 난무한다는 “남부국경의 무법상태는 모든 미국민의 안전, 안보, 재정적 웰빙에 위협”이라고 경고하며 장벽건설의 당위성을 거듭 주장했다. 다음 주 재발이 우려되는 정부 셧다운의 핵심 쟁점인 장벽 강행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장벽기금 확보를 위한 비상사태 선포는 안했지만 30분 전 초당적 협력을 촉구했던 대통령은 양극화 대립으로 인한 가장 시급한 사태를 해결할 어떤 타협안 제시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집권 첫해는 무슬림국가 출신자의 입국금지명령으로 초래된 이민논쟁으로 시작되었고 둘째 해는 국경에서의 이민 부모와 어린 자녀의 강제격리 정책을 둘러싼 더 뜨거운 이민논쟁에 휘말렸으며 금년 세 번째 해도 국경장벽 기금을 둘러싼 정부 셧다운 대립으로 시작되었다고 월스트릿저널은 지적한다.

‘반 이민’은 트럼프 행정부의 일관된 대표 정책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극우표밭에 어필해야할 2020년 대선까지 트럼프는 민주당의 일방적 양보가 없으면 이민에 대한 타협을 하지 않으려는 게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키우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감동적 장면들도 여러 차례 있었다. 2차 대전 참전용사, 홀로코스트 생존자, 힘든 뇌암 투병을 견디고 회복한 어린 소녀 등이 소개될 땐 초당적 기립박수가 터졌으며, ‘반 여성’ 대통령과 여성의원들의 ‘화해’의 순간도 인상적이었다.

금년 국정연설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사상 최다를 기록한 여성의원들의 존재감이었다. 여성 참정권운동을 기리는 단합의 표시로 흰옷을 입은 수십명 민주당 여성 하원의원들은 “지난해 신규 일자리 채용의 58%는 여성이었다”는 트럼프의 발표에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환호했고 트럼프는 여성들의 성공적 정계진출에 축하를 표해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트럼프는 다시 한번 초당적 단합을 호소하며 연설을 마무리했지만 평소 분열과 편 가르기를 조장해온 그의 단합 호소에 민주당이 설득 당할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여론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연설 직후 실시한 CNN 여론조사 결과 76%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긍정적 평가가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그의 단합 호소가 얼마나 진지한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얼마나 진지한가는 앞으로 며칠 그의 트윗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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