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트럼프의 러시아 늪’

2019-01-17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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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결코 러시아 위해 일한 적 없다” - 미국의 대통령이 자신은 적대국의 요원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월요일인 14일 아침 눈 덮인 백악관 잔디밭에서 벌어진, 역사에 기록될만한, 이 희한한 광경은 ‘지옥 같은’ 지난 주말 동안 쌓인 트럼프 대통령의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부 셧다운이 장기화되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트럼프-러시아 스토리가 뉴스 조명 속으로 되돌아온 것은 지난 금요일 밤,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나오면서였다. 2017년 5월 트럼프가 제임스 코미 FBI국장을 해임한 직후 FBI 방첩요원들이 트럼프의 러시아 공모혐의에 대해 조용히 수사에 착수했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알고 했던 모르고 했던 모스크바의 영향력 하에서 일했는지의 여부를 밝혀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무리 지난 2년간 트럼프의 ‘튀는’ 행동에 무감각해졌다 해도 미국의 대통령이 외국정부 요원 가능성을 의심받는 방첩수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바로 다음날 워싱턴포스트에 또 다른 폭로기사가 실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회담 후 통역사의 노트를 압수하고 대화 내용을 다른 정부관리들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는 등 회담 내용 은폐를 위해 극단적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전략적 이유로 일반이나 정적들에게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관련 참모들에게까지 숨기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트럼프와 푸틴은 “5번이나 만났지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미스터리”다. 구체적 내용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트럼프는 FBI를 비난하며 회담 내용 은폐기사는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고 일축했지만 트럼프의 “가짜 국경위기가 아닌 진짜 위기”라는 지적과 함께 파장이 확대되었다.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마녀사냥’ 보도에 성난 대통령이 방어대책으로 시도한 것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폭스뉴스와의 전화인터뷰였다. 그러나 12일 밤 인터뷰 후의 사태는 의도와는 달리 꼬여버렸다. 진행자가 러시아를 위해 일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트럼프는 “내가 받은 가장 모욕적 질문”이라면서 신문보도에 대해 “가장 모욕적 기사”라고 강력 비판했다.

다음날 언론들에선 트럼프가 정면 답변을 피한 채 얼버무렸다는 비난이 나왔고, 최장 기록을 세운 셧다운의 와중에서도 러시아 위해 일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급기야 트럼프 자신이 월요일 아침 정면 부인으로 사태 수습에 나선 것이다.

질문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며 러시아 공모 의혹은 “완전 거짓말”이라는 트럼프의 강변엔 아랑곳없이 재점화된 러시아 스캔들은 쉽게 가라앉을 기세가 아니다.


시간을 맞춘 것처럼 화요일엔 윌리엄 바 법무장관 지명자에 대한 상원 법사위의 인준청문회도 시작되었다. 청문회의 하이라이트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 ‘로버트 뮬러 특검 수사의 보호’

러시아 스캔들 의회조사를 단단히 벼르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의 송곳질문이 쏟아졌지만 이미 법무장관을 역임한 손색없는 자질과 풍부한 경험을 갖춘 노련한 윌리엄 바는 침착한 태도와 신중한 표현으로 흔들림 없이 대응했다. 확실하게 답변도 했고 능숙하게 피해도 갔다.

민주당이 가장 원했던 뮬러 수사에 대한 보호는 약속했으나 뮬러의 최종 보고서 내용 중 얼마나 공개할 것인지에 대해선 ‘특검 규정과 법에 따라’ 결정하겠다며 여지를 남겼다. 법무부 특검 규정에 의하면 뮬러는 법무장관에게만 ‘기밀’ 보고서를 제출하고 그중 무엇을 공개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결정한다. 그 규정이 자신에게 공공보고서 작성 권한을 준다는 그의 해석은 트럼프 요청에 따른 일부 내용 비공개의 문을 열어놓은 셈이다.

그러나 뮬러 보고서가 공개되기 전 자신들이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트럼프 법무팀의 주장에 대해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으며, 대통령이 정당한 이유 없이 뮬러 해임을 지시할 경우 사임을 불사하고 거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트럼프의 평소 주장과는 상반되게 뮬러 수사는 ‘마녀사냥’이 아니며, 러시아는 위협적인 존재라고 믿는다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그의 첫날 증언 중 최고의 순간은 정치적 야망을 가진 젊은 사람과 달리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 올바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68세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했을 때였다. 그는 “난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을 하도록 언론이나 의회, 대통령, 그 어느 누구에게도 위협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뮬러 보호 약속으로 주요 관문을 일단 통과했고 공화주도 상원이니, 과반 찬성만 필요한 인준은 무난할 것이다. 뮬러 수사에 대한 백악관 개입을 우려하는 민주당 뿐 아니라 수사 자체를 혐오하는 대통령과 거리두는 증언도 적지 않아 일부 민주의원들이 합류하는 초당적 지지도 기대하는 분위기다.

‘러시아 늪’이 다시 깊어지고 있지만 트럼프에게 유리한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비밀병기’로 비유되는 수사에 대한 피로감이다. 20개월 넘게 끌면서 이젠 웬만한 소식은 ‘빅뉴스’도 못되고 있다. 최종보고서가 제출되었을 때 여론 반응에 대한 불안한 전조이기도 하다.

빠르면 2월에 나온다는 뮬러 보고서에 워싱턴 정가가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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