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약삼단

2019-01-10 (목) 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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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삼단

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지난 주 중부지역에서 공부하는 둘째 애가 한 주 정도 시간을 내서 집에 왔다. 대학으로 떠난 후 날이 갈수록 더 보기 힘들어진 녀석이라 이번에 꼭 하루 정도는 둘이 데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2-3일 시간을 내서 겨울 바다라도 같이 다녀오고 싶었는데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바쁘다는 것이다.

대신 데이트를 알차게 하기로 했다. 아침에 워싱턴 DC의 성공회 교회를 찾아 예배드리는 것으로 시작 저녁에 볼티모어 시내에서 흑인 작곡가들의 음악공연을 보고 터키 레스토랑에서 식사 후 밤늦게 돌아올 때까지 빠듯하게 일정을 준비했다.

성공회 교회는 1842년에 세워진 교회였다. 시내 중심에 위치해있어 교인들은 많지 않았고, 헌금만으로 재정적 자립은 어려울 듯 보였다. 그래도 무숙자들 대상의 선교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흑인 무숙자들 빼면 나머지는 거의 백인들이고 평균 연령은 높아보였다.


점심식사는 차이나타운에서 했다. 전부터 우리 집 애들은 한 허름한 지하식당의 탕면과 만두를 좋아했다. 탕면에 고춧가루 소스를 듬뿍 넣어 먹었다. 담백하면서도 얼큰해진 국물에 속이 확 풀리듯 시원해졌다. 전날 밤늦게까지 있었던 친구 약혼파티로 두통을 호소했던 둘째의 표정도 한결 편해보였다.

이날 가장 의미가 컸던 것은 구 대한제국공사관 방문이었다. 작년 5월에 박물관으로 개관한 곳으로, 일요일이었지만 안내인이 있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에서 조선이 미국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던 이유가 충격적이었다. 1882년 청나라는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중재했다. 그 조약에 의거해 미국은 다음 해 공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에 직접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가 제시한 ‘영약삼단’(另約三端) 원칙을 받아들이겠다고 하고서야 1887년 박정양을 전권공사로 보낼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 외교사절은 첫째,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둘째,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셋째,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주권국가로서는 치욕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박정양은 이를 무시하고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청국 공사 없이 미 국무성을 방문했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날짜를 잡아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청나라 공사가 따졌으나 박정양은 본국을 떠나올 때 정부 지시를 자세히 받지 못했다며 굴욕적인 영약삼단 원칙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청국공사와의 불화 등이 문제가 되어 부임 10개월 만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이러한 설명에 강대국에 에워싸였던 구한말 조국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130년이 지난 오늘, 과연 그때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의문도 찾아들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남북한이 얼마나 자유롭게 주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남북 간의 대화가 미국과 중국의 사전 동의나 사후 승인 없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오랫동안 한반도를 속국으로 간주했던 중국의 기본적인 태도도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나. 그런 면에서 미국은 과연 중국과 얼마나 다를까 하는 물음도 들었다. 언제나 우리 조국이 주위 눈치 안보고 살 수 있을까. 이날 미국에서 태어난 둘째 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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