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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부딪친 ‘트럼프 장벽’

2019-01-10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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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원해서 한 연설이 아니었다고 한다.

8일 밤 ‘도널드 트럼프’답지 않게 차분했던(원고를 충실하게 읽었던) 대국민 연설을 하기 몇 시간 전, TV 앵커들과의 오찬에서 대통령은 이날의 연설도, 10일로 예정된 국경 방문도 자신은 내키지 않았으나 참모들에게 설득 당한 것이라고 대놓고 말했다. 연설이나 방문으로 “변하는 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하기는 한다…국경방문도 사진 찍기용 일뿐이다. 그러나, (대변인 등 공보팀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한다…” - 뉴욕타임스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참석자들을 인용한 보도다.

멕시코 국경의 ‘위기’ 고조를 경고하며 ‘그 유일한 해결책’인 57억달러 국경장벽 건설 예산 편성을 촉구한 트럼프의 대국민 연설이, 대통령의 입지가 약화된 정치환경에서 정부 셧다운이라는 돌발 상황에 직면해 급조된 홍보 전략의 하나라는 건 익히 알려졌다. 셧다운 장기화 영향이 전체 납세자에게로 확대될 경우의 정치적 타격을 깨달은 참모들이 여론몰이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셧다운의 주범인 국경장벽은 트럼프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핵심공약이지만 일반적으론 인기가 없다. 공영방송 NPR의 12월 여론조사에 의하면 장벽이 시급한 과제라는 응답은 28%에 그쳤고 우선과제가 전혀 아니라는 응답은 50%에 달했다. 8일 발표된 로이터통신 조사에서도 셧다운은 ‘트럼프 책임’이란 응답이 51%로 민주당 책임 32%보다 훨씬 높았다.

셧다운의 해결책 제시도, 새로운 내용도 없는 다소 밋밋한 9분의 짤막한 스피치였지만 목표는 시급하고 절박했다. 그를 신뢰하지 않는 국민 다수에게 국경 위기가 실재한다는 확신을 주어야 했고, 장벽 건설이 위기의 해결책인 것도 설득시켜야 했다. 확대된 지지여론을 발판으로 입지를 강화하고 확보한 지지를 대선까지 끌고도 가야 한다. 주 타겟은 국경강화는 지지해도 장벽 건설엔 회의적인 민주당 보수파와 공화당 중도파 표밭이었다.

백악관이 간 보느라 며칠 전부터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최대 관심사가 되었던 국가 비상사태 선포는, 이번 연설엔, 다행히 없었다. 선포할 경우 의회 승인 없이 장벽 기금 확보는 가능할지 몰라도 오랜 진흙탕 법정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어제, 셧다운 해소 위한 의회지도부와의 3차 회동이 정면충돌로 결렬되었으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트럼프 연설 특유의 관전포인트도 있었다. 부정확한 정보, 사실과 다른 주장을 얼마나 할 것인가 - 평소처럼 많았고, 미디어의 ‘팩트 체크’에서 줄줄이 지적되었다. 남부국경 통한 헤로인 밀반입을 강력 비난하며 장벽 건설을 그 해결책으로 강조했는데, 멕시코 헤로인 대부분은 남부국경 아닌 적법한 통관항으로 반입되고 있다…등이다.

민주당과의 대치에서 기선을 제압하려면 ‘위기’가 필요해서일까, 최근 백악관이 부쩍 자주 거론하는 ‘위기’가 이번 연설을 통해 새롭게 포장되기도 했다. 국경 위기, 범죄 위기, 일자리 위기의 공포로 치닫던 살벌한 분위기를 톤다운 시키면서 ‘인도주의적 위기’를 호소한 것이다.

그는 “망가진 미국 이민시스템의 최대 희생자는 여성과 아이들이며 이것이 남부국경 불법이민의 비극적 현실이다. 난 이 반복되는 인간적 고통을 끝낼 결심이다”라면서 그 해결책으로 장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설득력 약한 주장을 펼쳐갔다.

그러나 이민자를 미국사회의 재앙으로 몰아가는 고질을 버리지는 못했다. “몇 년 동안 수 천 명 미국인들이 불법입국자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지금 대처하지 않으면 수 천 명의 생명을 더 잃을 것이다. 이것은 인도주의적 위기이자 마음의 위기이며 영혼의 위기이다”


당파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 트럼프의 연설이 성공도, 재난도 아니었듯이 이어서 나온 민주당 리더들의 대응 연설도 딱 그만큼에 그쳤다. 경직되고 어색한 포즈로 나란히 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찰스 슈머 상원 민주당 대표는 각각 2분씩 트럼프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통치란 떼쓰기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질책하며 “미 국민을 인질로 잡는 것을 멈추고, 위기를 제조하는 것을 멈추고, 정부를 재개하라”고 촉구했으나 민주당 역시 트럼프 못지않게 자신들의 강경 입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뜻이 없음을 확실히 했다. 이미 지지여론을 체감하는 민주당이 셧다운 싸움에서 유리한 입지인 것을 자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국민 연설이 중도 표밭의 ‘트럼프 장벽’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지지로 바꾸는데 성공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핵심지지층을 열광케 하며 “뷰티풀 스피치”라는 찬사도 받았지만 그밖의 표밭에선 추락한 신뢰도가 연설 하나로 회복되기는 쉽지 않아서다. “인도주의적 위기로 재포장되었어도 그의 상품(장벽)은 여전히 팔리지 않고 있다”고 NBC뉴스는 지적했다.

특히 의회의 기상도는 잔뜩 흐린 상태다. 내분 심한 요즘의 민주당이 장벽 이슈에선 유독 요지부동으로 단합을 과시하고, 일부 공화의원들도 트럼프를 등지며 이탈을 감행하고 있다. 트럼프의 영향력 약화가 벌써 시작되고 있는 것일까.

그건 트럼프의 장벽이 벽에 부딪쳤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새 민주당 하원이라는 벽이며, 신뢰를 잃은 그에게 쉽게 설득당하지 않는 여론의 벽이다. 이 벽을 넘기 힘들다는 것을 어쩌면 트럼프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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