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니의 시선’으로 새해를

2019-01-04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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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번다면 어떨까? 한달 열심히 일해도 한달 생활비가 빠듯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일 것이다. 한국에는 새해 덕담으로 새로운 말이 등장했다. ‘적일많버’ - 적게 일하고 많이 벌라는 신조어이다.

대학을 나오고도 취직을 못해서 알바를 전전하는 젊은이들이 희망삼아, 스트레스 해소 삼아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 유행했던 “부자 되세요” 만큼이나 노골적으로 배금주의를 부추기는 게 거북하고, 그렇게 노골적일 만큼 돈/임금에 맺힌 한이 많은 것 같아서 마음이 아리다.

‘직원은 가족’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노사 간의 이해가 같을 수는 없지만 회사가 잘되면 모두에게 득이 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다. 입사하면 은퇴까지 수십 년을 같이 지내니 직장 동료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에서 대기업 최고경영자와 직원 간 보수 격차가 20~30배 되던 70년대 즈음의 이야기이다. 격차가 300~400배로 벌어진 지금 직원은 가족이 아니다. 고용주는 필요에 따라 채용하고 필요 없으면 감원하고, 직원은 필요에 따라 일하고 나은 기회가 있으면 바로 떠난다.

고용주의 최고가치는 이윤, 직원의 최대관심은 봉급 - 사람은 없고 돈만 보이니 세상은 각박할 수밖에 없다. 신조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저마다 ‘적일많버’를 목표삼아 떠도는 부초들의 시대이다. 몰이해, 단절, 갈등, 고독이 깊어지는 배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해 첫 메시지로 ‘어머니의 시선’을 강조했다. 지난 1일 미사 강론에서 교황은 “도처에 고독과 분열이 넘쳐난다”며 “분열과 절망으로 가득 찬 현대사회의 유일한 해독제는 모성(母性)”이라고 말했다.

인종으로, 종교로, 문화로, 출신지역으로, 노사로 … 구분 가능한 틈만 있으면 갈라져서 대립하는 파편화한 현대사회에서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의미이다. 교황이 지난해 첫 미사에서 강조한 ‘이민자와 난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메시지와도 상통한다.

이민자와 난민은 대표적 배척의 대상. 인종, 종교, 지역, 문화 등 총체적으로 ‘우리’와 다른 존재라는 선입관이 강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강간범, 마약밀매자로 매도한 ‘그들’이자, 제주도에 예맨 난민들이 도착하자 성범죄 증가와 일자리 잠식 위험을 내세우며 한국인들이 배척한 ‘그들’이다.

“이민자와 난민은 신이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가장 약하고 불우한 사람들”이라고 교황은 지난해 말했었다. 모성으로 특별히 품어 안아야 할 대상들이라는 말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소수를 위한 당장의 이익에 매달리지 말고 모든 사람을 위한 이익을 추구하라고 교황은 말하고 있다. 포용하고 화합하라는 메시지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다를까? 낯설면 두려울 만큼 그렇게 다를까?

세계인들이 모두 한 거리에 산다고 가정해보자. 소득별로 분류해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거리의 끝, 가장 부유한 사람은 반대쪽 끝, 그리고 나머지는 그 사이에 산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스웨덴의 비영리재단인 가프민데르의 ‘달러 스트릿(Dollar Street)‘ 프로젝트이다.

편견과 무지를 벗어나 세계를 데이터에 기초해 바로 보자는 운동을 펼치는 이 재단은 세계인들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진자료를 동원했다. 사진작가들을 보내서 각 가정의 침대, 음식, 칫솔, 신발, 조리기기, 변기, 장난감 등 130여개의 일상 생활용품들을 카메라에 담게 했다. 현재까지 확보된 자료는 50개국 264가구의 생활상.

달러 스트릿 사이트에 들어가서 사진자료들을 둘러보면 세계인이 사는 모습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거리의 끝, 빈곤층을 보면 나이지리아 가족이든 네팔 가족이든 생활방식이 비슷하고, 다른 쪽 끝 부유층 역시 집안의 물건들만 보면 그곳이 탄자니아인지 미국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50억 명에 달하는 소득 중간층 역시 중국에 살든, 멕시코에 살든, 브라질에 살든 일상생활의 모습은 거의 같다.

비슷한 것들을 쓰며 비슷한 것들을 갖고 싶어 하며 사는 것이 21세기 인류의 모습이다.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목숨 걸고 국경에 도착해 도움을 청한다면 품어주라고 교황은 말한다.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을 잘라내며 몇몇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라고 교황은 말한다. 포용과 화합이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이라는 말이다.

새해에 ‘적일많버’ 같은 덕담은 서글프다. 저마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번다면 나머지 일은 누가 하는가. 일은 하나도 안하고 떼돈으로 떼돈 버는 금수저 부류로 인해 사회적 문제는 얼마나 많은가.

새해 첫 주, 주식시장은 불안하다. 새해에는 함께 잘 살기를 바라야 하겠다. ‘어머니의 시선으로’ 포용하고 화합해서 우리 모두 한해를 잘 살아내기를 바란다.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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