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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유산… ‘천개의 불빛’

2018-12-06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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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을 앓고 있는 가난한 어린 환자들이 타 지역의 전문의에게 진료 받을 수 있도록 항공료를 지원하는 ‘기적의 비행(Miracle Flights)’은 이번 달로 12만1,000회를 기록했다. 아픈 아이들과 가족들을 미 전국은 물론 때로는 해외까지 한 달 평균 700회나 실어 나르며 기적 같은 ‘생명의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라스베가스의 자원봉사 자선단체인 ‘기적의 비행’은 지난 주말 타계한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의 ‘천개의 불빛’ 중 하나다. 냉전시대 종식과 걸프전쟁, 장애인법 제정 등 굵직한 업적들 못지않게 41대 대통령이 정성을 쏟았던 ‘따뜻한 유산’이다.

‘천개의 불빛(a thousand points of light)’은 부시가 1988년 공화당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미국의 자원봉사 단체들을 “광활하고 평화로운 하늘에 퍼져있는 천개의 불빛”에 비유한 찬사에서 나왔다. 미국 곳곳에서 선행으로 커뮤니티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주는 자원봉사의 힘에 대한 그의 오랜 믿음에서 나온 메시지였지만 살벌한 정치판에선 무사하지 못했다.


“보수의 빈곤퇴치 정책이 ‘불빛을 밝혀라’이냐”는 비판이 나왔는가 하면, ‘따분한’ 실용주의자로 비쳐져온 부시의 ‘시적(詩的)’ 표현은 심야토크쇼의 단골 소재로 조롱당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리버럴들에겐 ‘천개의 불빛’보다는 재정 든든한 정부의 ‘전구’가 더 미더울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부시는 개의치 않았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국정연설에서, 재임 중 200여 차례 스피치에서 “하늘의 별처럼 전국에 퍼져있는 커뮤니티 단체들”의 중요성을 거듭 언급하며 자원봉사 확대를 위한 ‘천개의 불빛’ 비전을 제시했다. 국가봉사국을 신설해 백악관에 상주시켰고, 전국커뮤니티봉사법 제정을 실현시켰으며, 불빛재단을 설립했다.

자원봉사 활성화를 지원하는 불빛재단이 봉사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제정한 ‘일상의 불빛’ 상은 그의 4년 재임 중 1천여 명에게 수여되었다. 이민노동자 가족을 도운 한 농부에서 대규모 자선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봉사자들의 수상식이 열리는 곳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달려갔다. 그렇게 부시는 675개의 ‘불빛’을 만났고 대통령의 감사를 직접 전했다.

정부의 힘만으로는 커뮤니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던 부시는 취임 첫날부터 자원봉사 확산에 뛰어들었으나 그의 ‘천개의 불빛’ 캠페인은 통치정책이라기엔 상징성이 강했다. 미 사회문제 해결책으로는 너무 단순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정계의 비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논쟁과는 상관없이 부시의 ‘천개의 불빛’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한국에선 ‘촛불재단’으로 불리는 ‘불빛재단’은 꾸준히 성장해 현재 37개국 250개 도시에서 매년 2,000만 시간을 봉사하는 500만 명의 참여를 돕는 세계 최대의 자원봉사 지원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일상의 불빛 상’ 수상자도 6,300명을 넘어섰다.

“누구나 ‘하나의 불빛’이 될 수 있으며 이 불빛들이 미국의 위대함의 원천이고 미국의 영혼”이라고 강조하는 그의 신념은 조용하나 꾸준한 호응으로 이어졌다. 솔선수범으로 자신도 밝게 빛나는 ‘불빛’이었던 그의 호소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뉴잉글랜드 지방의 상류층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 교육을 받아 온 부시는 봉사의 가치에 대해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예일대 재학 중 ‘유나이티드 니그로 칼리지 기금’을 시작했고, 텍사스 시절엔 저소득층 지역에서 YMCA 설립을 도우며 농구팀 코치를 맡기도 했으며 어린 딸이 백혈병으로 죽은 후엔 백혈병 연구재단 지원에 앞장섰다.


고령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봉사 열정은 식지 않았다. 정적이었던 빌 클린턴과 손잡고 재난지역 구호기금 모금을 성공적으로 해냈으며 93세였던 작년에도 4명의 생존 대통령들과 함께 태풍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콘서트에 참석했다.

몇 달 전 몬태나의 공화당 선거지원 유세 때 트럼프 대통령이 ‘천개의 불빛’을 조롱해 논란을 부른 적이 있었다. “천개의 불빛, 도대체 그게 뭐야? 난 뭔지 전혀 모르겠네. 무슨 뜻인지 누구 아는 사람 있나?”

부시의 손녀 제나가 트윗으로 대답했다. “불빛은 타인에 대한 봉사의 비전이다. 그것은 우리나라를 밝히는 비전이며 난 우리나라가 이 비전을 잃지 않기 바란다”라고 말한 제나는 이어 삶의 행복을 봉사에서 찾으라고 일러준 할아버지의 편지를 소개했다.

그 편지에서 부시는 평생을 지켜온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 번 말했다 : “모든 성공한 삶에는 타인에 대한 봉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오늘 마지막 조사가 바쳐지고, 지난 일주일간 이어졌던 작별의 인사도 끝나면 94세의 노대통령은 전 국민의 배웅을 받으며 아내 바바라와 딸 로빈이 기다리는 곳으로 떠날 것이다.

그의 자원봉사 지원이 성공적 ‘정책’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그러나 ‘기적의 비행’으로 새 생명을 찾은 수만명 아이들을 포함한 수백수천만명의 삶에 밝혀진 ‘천개의 불빛’이, ‘아버지 부시’의 성공적 유산으로 남아 오래도록 꺼지지 않고 점점 더 밝게 빛날 것은 확실하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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