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들만 ‘안 믿는’ 기후변화

2018-11-29 (목) 박록 고문
작게 크게
미국인들이 샤핑과 풋볼과 터키 샌드위치에 빠져있는 추수감사절 다음날은 ‘뉴스의 무덤’으로 불린다. 지난주 이 블랙프라이데이에 연방정부의 기후변화 보고서가 슬며시 발표되었다. 원래 12월 중순 워싱턴에서 열릴 과학 컨퍼런스 때로 예정되었던 발표를 갑자기 앞당긴 것이었다.

누가, 왜, ‘보고서의 저자인 과학자들도 놀랐다’는 발표일정 변경을 지시했을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대답은 나올 리 없는 채 의혹만 떠돌 뿐이다. 다행히 ‘꼼수’는 통하지 못한 듯 보고서는 이번 주 들어서도 계속 관심권에 머물러 있다.

어물쩍 묻어버릴 수 있는 보고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 연방의회를 통과한 지구변화연구법에 의해 매 4년마다 행정부가 제출해야 하는 비당파적 보고서다. 부시와 오바마 때도 발표되어 연방 기후정책 결정의 주요 자료가 되었다. 이번 보고서 역시 13개 연방기관의 공동 참여로 300여명 과학자들이 수년간 연구결과를 분석한 방대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1,656 페이지에 달하는 ‘국가기후평가’ 보고서의 첫 문장은 이런 선언으로 시작된다 : “지구의 기후는 지금 현대문명사의 그 어느 시점에서 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그 주요 원인은 인간의 활동이다. 이미 미국에서 체감되고 있는 지구 기후변화의 영향은 미래엔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미래 영향의 심각도는 온실개스 배출을 줄이면서 앞으로의 기후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 여부에 달려있다”

지구온난화에 대처하지 않을 경우의 위험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내용을 담은 보고서는 매년 수천억 달러에 이를 경제적 타격으로 금세기 말까지 미 국내총생산(GDP)의 10% 이상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질병 만연과 잦은 재난으로 미국민의 웰빙이 위협받고, 극심한 기후변화를 감당하기 힘든 도로와 다리, 댐과 전력공급 등 낙후된 기간시설은 붕괴될 것이다…

기후변화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심각하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선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가장 극단적 시나리오’에 근거했다고 백악관은 비난하지만 그것은 온실개스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을 거의 안 할 심각한 경우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연료 효율적 차와 빌딩으로 바꾸는 등 적극적 감축 노력과 해수면 상승 등 기후변화에 대한 대비를 병행한다면 위험의 정도를 상당히 경감시킬 수 있다는 보다 장밋빛 시나리오도 제시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현재와 미래의 기후 조건이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는 추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못 박고 있다.

“인간들은 몇 세기 동안 바다가 정해진 자리에 머물 것으로 추정하며 해안가에서 살아왔고, 정해진 시기에 밀과 옥수수를 심으며 일정량의 수확을 기대했고, 계절의 순환은 변치 않을 것으로 믿으며 12월의 눈을 즐기고 꽃 피는 봄을 기다려왔다. 그러나 이제 바다의 수면은 상승하고 수확은 휘청대는가 하면 계절은 불규칙하게 왔다가 가버린다…”고 애틀랜틱 지는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97%의 과학자들이 증거에 근거해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치명적인 산불과 폭염, 태풍과 홍수 등의 재난으로 기후변화를 체감하는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정색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기가 힘들어졌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의 기후변화 부정은 확고하다. 자신의 행정부 보고서에 대한 첫 공식반응도 “난 믿지 않는다”는 묵살이었다.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선 “나 자신 같은 사람들, 우리는 지능 수준이 매우 높지만 (기후변화) 신봉자가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새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한 발 더 나가 이 보고서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정책이 기후변화 대처는커녕 부채질하는 방향으로 줄곧 역행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대선 당시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주장했던 트럼프는 취임 직후부터 ‘오바마 지우기’를 겸해 파리기후협정 탈퇴, 청정전력계획 폐지, 화력발전소 배출규제 폐지, 자동차 연비기준 완화, 석유산업의 메탄개스 배출규제 완화 등 보고서의 조언과는 정반대로 치달아 왔다.

기후변화를 반박하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후변화 부정이 트럼프에 의해 선거 전략으로, 공화당에 의해 오바마 반대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과학적 논쟁이 아닌, 정치적 논쟁만을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 보고서는 기후변화 가속화를 예고하며 그 영향으로 인한 심각한 위협을 경고하고 있지만 미국과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음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기후변화 자체를, 특히 정책 결정자인 대통령이, 사실로 인정해야 해결책도 시작될 수 있다. “위대한 미국”을 외쳐대는 트럼프가 “위대한 기후”도 원한다면 좋으련만…아직은 요지부동이다.

트럼프의 기후변화 무 대응이 무지의 산물인지, 정략적인 무시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런 방침이 미국과 지구를 위험지대로 몰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가 두려워해야 할 사실로 다가오고 있다.

<박록 고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