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삐 풀린 산불’

2018-11-15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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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제발…” 두려움에 찬 여성의 절규, “아가야,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불안한 어린 딸을 달래는 젊은 아빠의 낮은 노래 소리…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을 헤치고 탈출하는 운전자들의 절박한 순간들이 동영상을 통해 전해지는 가운데 화재 발생 1주일을 넘긴 14일 현재 51명이 숨지고, 100여 명이 실종되었으며, 수 천 명이 홈리스가 되었다.

이미 주 사상 최악의 산불로 기록되었는데도, 캘리포니아는 아직 불타고 있다.

대부분 ‘우리 동네 산불’의 공포를 체험한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해마다, 아니. 이젠 일 년에도 몇 번씩 같은 의문에 사로잡힌다 : 왜 캘리포니아 산불은 갈수록 잦아지고, 갈수록 악화되는 것일까. 왜 무섭도록 빠르게 번지는 것일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화재 위험이 높아 벌써 몇 번씩 집이 타버린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짓는 것일까…


캘리포니아 산불 악화의 복합적인 원인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가뭄과 바람과 지형이다.
뜨겁고 건조한 긴 여름 끝에 가을과 겨울의 짧은 우기가 잠깐 지나가는 캘리포니아의 기후 자체가 “불을 붙이기만 하면 맹렬하게 타오를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컬럼비아 대학의 생물기후학자 파크 윌리엄스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건조한 기후가 통제 불가능의 ‘고삐 풀린 산불의 계절(runaway fire season)’로 이어지고 있다고 산불생태학자 랜디 잰트도 우려했다.

보통 10월에 시작되는 가을비가 금년처럼 제때 내리지 않으면 숲과 들의 초목은 완벽한 불쏘시개가 되어버린다. 이번 ‘캠프 산불’로 잿더미가 된 산기슭 마을 파라다이스에는 10월부터 11월초까지 거의 비가 오지 않았다. 강우량이 0.14인치로 예년 평균의 3%에 불과했다.

기후변화는 산불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지만 사태를 악화시킨다. 지구온난화로 화씨 2~3도 가량 더 오른 고온이 초목을 더 건조시켜 더 오랜 기간, 더 강하게 타오르게 한다. 지난 30년간 산불 지역을 두 배로 늘린 기후변화가 계속될 경우 2100년엔 산불 피해면적이 77%나 늘어날 것으로 연구보고서들은 예상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의 산불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파괴적이다. 지난 20년간 산불로 인한 경제적 손실의 80%가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발생했다. 시속 50~70마일의 강풍 때문이다.

소방관 도착도 전에 강제 대피령을 내리게 한 북가주의 캠프 산불은 시속 70마일로 불어 닥친 ‘악마의 바람(Diablo Wind)’을 타고 단 1초 만에 풋볼구장 크기의 면적으로 번졌고. 남가주의 ‘울지 산불’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3만5,000 에이커로 확산시킨 ‘샌타애나 바람’은 13일 밤 새로 시작된 LA 동쪽 시에라 산불을 위협하며 밤새 주민들을 불안케 했다.

‘고삐 풀린’ 캘리포니아 산불의 진화를 한층 힘들게 하는 것은 지형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방관들이 접근하기도, 진화하기도 힘든 언덕과 계곡과 숲속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때문이다. “네바다에서도 대형 산불은 많이 발생하지만 들판에서 타다가 꺼진다.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타들어가는 게 아니다”라고 대기과학자 니나 오클리는 비교한다.


이번에도 150여 채 주택이 전소된 말리부에선 1929년 이후 10년마다 평균 2건의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 피해도 막대해 1956년엔 주택 100채가, 1970년엔 103채가, 1978년엔 230채가, 1993년엔 268채가…불에 탔다. 매번 산불 후엔 더 비싼 새 주택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경고들이 나오고 있다. USA투데이가 ‘캘리포니아 산불의 딜레마’라고 이름 붙인 “불타고 다시 짓고 또 불타고 다시 짓는” 악순환은 이제 멈춰야 할 때라는 지적이다. 인명과 개인재산의 피해만이 아니라 대규모 진화작전에 드는 세금도 엄청나 한 채당 63만8,000달러에 달한다.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성공적인 산불진압도 요즘 산불을 악화시키는 원인의 하나로 꼽힌다. 산불은 잡목과 덤불을 정리해 새로운 초목이 자라게 하는 생태계의 자정기능이기도 한데 신속한 진화로 켜켜이 쌓이고 무성해진 초목들이 더욱 맹렬히 타게 하는 연료가 되고 있어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실한 삼림관리가 산불의 원인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삼림관리는 산불예방의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화마에 쫓기는 주민들이 필사적인 탈출을 하고 있고, 뜨거운 사선에서 수 천 명 소방관들이 목숨 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는 순간에, 비가 온다고 전몰장병 묘소 참배를 취소한 대통령이 연방지원 중단 위협의 빌미로 삼아 트윗을 날릴 사안은 더더욱 아니다.

산불을 악화시키는 가뭄과 바람과 지형 자체는 인간의 능력으론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영역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적극 대처까지 막아 고삐 풀린 산불은 총기난사처럼 캘리포니아의 ‘뉴 노멀’이 되어가고 있다.

더 높은 언덕과 더 깊은 계곡엔 다시 새 집들이 들어서고 기후변화 대책도, 산불위험 지역의 신축 규제도 강화하지 못한 채 다음 산불을 지켜보게 될까…두려워진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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