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의를 변호하는 입장”

2018-11-13 (화) 김성실/ 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 인종정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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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체스터 칼럼

500여년이 넘도록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며 변호하였음에도 미국 내에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이고 사악한 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구약성서 미가서 6장 8절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do justice, love neighbors and walk humbly with God)”을 구하신다고 써 있다.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분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끊이지 않는 기도와 자아성찰을 필요로 한다.

얼마 전 소셜 네트워크에서 접한 1800년대 말에 발행된 노예 경매시장의 광고를 보고,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다시금 경악하여, 다시는 이런 무서운 죄악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1861년 남북전쟁 이전까지 남부지방의 경제는 아프리카에서 잡혀 온 노예 후손들의 노동에 의해 활성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예들은 가축처럼 취급되었다. 1705년 버지니아 주법은 노예는 개인의 부동산으로 구분되어, “흑인이나 혼혈아(백인에 의해 강간당한 노예의 자녀들), 원주민은 부인이나 자녀들에게 재산처럼 상속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시장에 팔려가는 노예들은 가축을 가두는 철창 우리에 어린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품에 안겨 가족단위로 갇혀지기도 하였다.

철창 앞면은 헝겊을 씌워 속칭 “상품”이 구매자들에게 미리 보여지지 않게 하였고, 관심 있는 구매자들이 철창 앞에 가까이 가면 헝겊을 제치거나 미리 마련된 연단 위에 노예들을 오르게 하여 경매를 시작하였다. 경매자들은 장갑을 끼고 노예의 치아를 문질러보며 썩은 이가 많은 것이 나이가 많아서라며 경매가를 낮추기도 하였다. 남성노예는 “buck”, 여성은 “wench”라 부르며 이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일어섰다 앉았다하는 자세를 하게하고, 한 발로 뛰며, 종종걸음을 걷고, 점프를 하게 한 후 경매가격을 매겼다.

1848년 루이지애나 주에서 통과된 법에는 흑인 여성과 남성을 함께 감옥에 가두어 두고 여성이 임신을 하여 출산하게 되면, 그 부모가 종신형을 살고 있는 경우에 태어난 아이들은 주 정부의 재산으로 간주하였다. 생모는 10살까지 아이를 양육하게 하고 그 후에 신문에 광고하여 법원 문 앞에서 그 아이를 경매에 부쳤고 “현금결제”를 하였다. 대부분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어린 노예들을 구매하였고, 모여진 구매금은 백인아이들의 교육비로 쓰여졌다는 백인들의 잔인무도함은 흑인 자손들 온몸에 타투처럼 새겨져 절대로 잊을 수없는 일일 것이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하나의 정의가 다른 사회적인 이슈, 제도와 엉키듯 연결되어 있고, 나의 이해관계와도 연결되어 불편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력하다보면 정의를 행하는 것도 습관화 될 수 있고, 비록 선별적이기는 하더라고 그럴듯하게 따라 갈 수는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이 직접 정의를 행하기 어려울 때는 ‘정의를 변호하는 입장’에 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성실/ 연합감리교회 여선교회 인종정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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