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웃 오브 아프리카

2018-11-10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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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붐하던 안개가 걷히면서 풍경이 또렷해지고 색상이 살아난다. 정오를 지난 태양이 따갑다. 멀찌감치 지나가는 평원의 녹음 짙은 나무와 뭉게구름을 이고 있는 파란 하늘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하다. 십 년도 더 전에 본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떠올린 건, 아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조금만 더 달리면 여주인공 카렌의 집이 나타날 것만 같다. 오늘은 손꼽아 기다리던 데니스가 돌아오는 날이다. 그와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한 번 더 하늘을 날 수 있으리라. 사랑하는 데니스를 만날 생각에 카렌은 가슴이 뛴다.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에 놓인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던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나는 카렌과 데니스를 생각한다.?사랑하는 여인의 머리를 정성껏 감겨줄 때 그의 얼굴에 스미던 감미로운 표정과 섬세한 손길, 잊히지 않는 기억 속의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때 음악이 끝났다. 나의 상상도 거기에서 멈춘다.


연인의 사랑과 대자연의 풍광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아름다웠다. 광활한 초원과 붉게 타는 석양, 하늘을 나는 노란 경비행기 아래 무리 지어 달리는 홍학 떼 등 하나하나가 예술 사진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한 남자와 과감한 모험을 꿈꾼 한 여자의 운명적 사랑을 그린 영화였다. 그들의 인연은?아프리카 케냐의 대초원을 달리는 기차에서 시작된다.

결혼하여 농장을 운영할 희망으로 아프리카에 정착한 카렌은 남편과의 가치관이 더는 같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황량한 아프리카에 홀로 버려진 듯한 그녀의 외로움은 어떤 역경보다 힘들다. 하루가 멀다고 이어지는 잦은 사냥과 무분별한 여자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남편은 결국 카렌과 이혼한다. 정신적 고통을 잊으려고 고단한 농장 일에 몰두하던 그녀는 우연히 자신의 커피 농장에 들른 데니스를 만난다.

데니스는 카렌의 문학적 잠재력을 이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녀가 이야기를 통해 글을 쓰는 동기가 되고, 두 사람은 문학으로 유대감을 키워간다. 아프리카의 대자연과 모차르트와 문학을 사랑하는 그는 그녀와 비슷한 영혼을 가진 남자이다.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결혼에 구속되는 걸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하고 싶은 여자는 사랑의 평행선을 걸으며 갈등한다.

외로움이 그 무엇보다 두려운 카렌이다. 유일한 일터이자 정신적 지주인 커피 농장마저 그즈음 화재로 잃게 되자, 그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데니스가 그녀를 경비행기로 공항에 데려다 주기로 한 날,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며 가슴 설레던 그녀에게 데니스의 비행기 사고 소식이 날아든다. 이제 그녀 가슴에 남은 아프리카란 어떤 의미일까. 실존 인물인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살던 17년 이야기를 풀어내어 소설로 발표한다.

카렌과 데니스가 주연이고 원주민이 조연, 아프리카의 자연이 배경인 영화와는 달리 소설에서는 자연이 주연이었다. 도시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어두운 뒷골목 풍경을 보는 듯했다. 그곳에서는, 계속되는 악천후를 상대로 필사적 사투를 벌이는 동물과 인간의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아프리카 초원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몇 달씩 이어지는 가뭄에 인간은 속수무책이었다. 강물은 바닥을 드러내었고, 타들어간 농작물은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물을 찾아 헤매는 동물들의 메마른 울부짖음이 광야를 뒤흔들었다.

책은 흡인력 있게 나를 몰입시켰다. 장엄한 아프리카의 자연에서는 기후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화와 소설은 자연의 두 가지 얼굴을 보여주었다. 서로 다른 두 얼굴은 곧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누가 자연을 아름답고 평화롭다 했을까 싶으리만치 자연은 매정하고 때로 잔인했다. 경외로운 자연 앞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인간이 존재감을 회복하고 인간다워지는 것은 정신적인 사랑의 힘이 있을 때뿐이었다.

작가는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서는 인류애적인 사랑을 깊이 있게 그렸다. 그렇게 회복한 존엄 속에서 정신과 문화가 되살아난다는 점을 소수 부족의 삶을 통해 이야기했다.
책장을 넘기며 여성작가 특유의 문학적 은유에 가슴이 촉촉이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행간에 부린 암유는 쉽게 풀 수 없는 비밀부호처럼 은밀했다.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책에서는 문장력이나 문학적 장치로 독자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정신적 쉼터와 위로가 필요할 때 영화와 문학에 기대고 싶은 이유가 아닐까.

석양이 몸을 낮추고 있다. 빛을 걷어 들이는 시간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는 아마 지금쯤 곤충과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리라. 주홍빛 노을로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태양이 그려진다. 머지않아 그림자를 지우며 대지는 어둠과 적요에 잠기고, 동물은 휴식으로 이완하며 잠을 청할 것이다. 자연을 품에 안고 하루를 닫는 시간이 조용히 지나고 있다.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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