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택시!”

2018-11-05 (월)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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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택시! 손을 흔들며 택시 한 대를 잡아 세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가 서행하며 우리 앞에 차를 댄다. 이렇게 택시를 불러 세우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미국에서 우버나 리프트 자동차를 휴대전화 버튼 몇 번 눌러 내가 있는 곳까지 자동으로 불러오는 데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편리하기는 하지만 저 멀리 ‘빈차’ 사인을 켜고 고개를 넘는 택시를 찾는 재미와 기다림은 잊은 지 오래다.


잠시 한국을 방문하니 갈 곳은 많고 시간은 없어 주로 택시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가보니 전보다 기본요금이 제법 올랐는데도 미국에 비해 택시비가 너무 저렴했다.

이동 중 바깥 풍경도 볼 수 있으니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더없이 빠르고 좋은 교통수단이다.

서울에만 있기 아쉬워 시간을 내 부산을 방문했던 날이다. 쨍하기만 하던 날씨에 갑자기 여름 소나기가 내려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부산 달맞이고개 어귀에서 잡은 택시에 올라타자 자리마다 정성스레 깔린 방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보던 꽃자수 방석이 정겹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났을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부산 사투리 구수한 할아버지 기사님이 나와 동행인 친구를 반겼다.


창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옛 가요가 흘러나온다. 가사는 다 모르겠지만 멜로디를 흥얼거려 본다.

뜨겁고 건조한 캘리포니아에서 살다가 빗속 풍경에 들어오니 또 다른 고국 여행의 맛이 난다.

한국 살 적에는 택시기사가 말을 걸라치면 얼른 이어폰을 꽂아 버리거나 눈을 감아 대화를 차단하는 승객이었는데 나도 이제 미국사람이 다 되었는지 스몰토크 거리로 정면에 붙은 아이 사진에 대해 묻는다.

사진 속 아기는 거기에 매달려 승객들을 맞이하듯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다.

“아기가 너무 귀엽네요. 기사님.”

“예. 아주 비싼 놈입니다.” “네?”

저 손주 놈 보러 가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해요. 아들놈 내외가 저기 경기도 사는데 보러 가려면 열심히 택시 몰아야죠.”

“아, 그러시구나.”

잠시 미국에 두고 온 보고 싶은 얼굴들을 그렸다 지웠다. ‘목적이 있는 삶’이 뭐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는 걸 또 배운다.

보고 싶은 이를 보고자 돈을 벌고 하루를 버틴다.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가는 길을 위해 오늘도 수많은 길을 달린다. 본인과 승객들의 그리움을 싣고 말이다.

목적지에 도착해 차비를 내며 거스름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팁도 내는데 한국에서는 값싸고 편하게 이동한 데에 대한 수고비가 너무 적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기사님이 씽긋 웃어 보였다. 손주 보러 가는 길에 조금 보탬이 되었겠다 싶어 돈을 쓰고도 뿌듯했다.

택시가 저만치 멀어져 가다. 이내 또 다른 손님의 택시 부르는 소리에 멈춰선다.

오늘같이 손님이 끊이지 않는 ‘운수 좋은 날’이 이어진다면 할아버지는 곧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손주를 볼 수 있겠지.

목적지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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