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은 그저 오늘의 몫을

2018-10-29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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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저 오늘의 몫을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쯤, “똑똑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 끝까지 완주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구나, 하고 생각은 했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았다. 실적을 어떻게 얼마나 쌓아야 졸업하고 나서 백수가 안 될 수 있을지 생각하기에 바빴던 때였다.

당연히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좋은 자리를 얻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골몰했다.

박사과정에 진학하지 말라는 조언은 수없이 들었었다. 특히 인문사회 계열은 졸업해도 앞길이 막막하고,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으며, 유학을 가면 몸고생 마음고생만 하고, 결혼시기도 놓친다고.


그렇지만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이 좋았고, 어느 정도 재능도 있었고, 앞으로도 업으로 삼고 싶어서 진학을 선택했다.

발을 현실에 단단히 딛고, 눈은 이상에 두고 싶었다. 이번 학기에 논문을 몇 편 써서 투고하면 얼마나 실적이 쌓일 거고, 수업을 할 때는 어떻게 하면 강의평가가 더 잘 나올지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다가 받침대를 하나하나 쌓아 가면 이상에 닿을 거야.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다. 내가 그만큼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은 건 물론이다. 성공 스토리들은 주변에 넘쳐났고, 그만큼 노력하면 나도 그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발을 현실에 딛고 눈은 이상에 둘 만큼 나는 키가 크지 않았다. 이 간단한 사실을 혹독하게 깨달아야만 했다. 발 딛고 있는 현실이 하나씩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틈을 메우는 데만 급급했다. 투고했던 논문이 거절되면 다시 수정해서 내고,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혼자 삭히고, 통장 잔고가 위험해질 때쯤 혼자 동동거리고… 그렇게 현실에 하나씩 금이 갔고,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현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박사과정을 그만둬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앓아누웠다.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했다. 견디다 못한 몸이 파업에 들어갔다. 몸과 마음은 연결돼 있다는 말답게, 마음이 무너지니 몸이 함께 무너진 거였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 때 다시 떠올랐다. 버티는 사람이 끝까지 완주하는 거라고. 똑똑한 사람이 되려고 한 게 잘못된 거였다. 그저 오늘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가고, 오늘 몫의 기쁨을 즐기고, 오늘 내가 느끼는 좌절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음날 다시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충분했는데.

닿을 수 없는 이상을 올려다보기만 하면 안 됐었다.


돌을 다섯 개 던지면 보통은 이리저리 흩어진다. 수백 번 반복해서 던지다 보면 우연히 돌이 일렬로 늘어설 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하루도 똑같은 건지도.

우리는 매일 흔들리면서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게 기본이고, 완벽한 하루를 보내는 행운은 혼돈 속의 우연한 질서처럼 어쩌다가 한번 뿐인 거겠지.

똑똑한 사람이라면 돌을 한번에 일렬로 예쁘게 던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계속 돌을 던지고, 시행착오를 겪고, 좌절하고, 그럼에도 또 돌을 주워 담아서 던져보는 사람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것 같다.

오늘 필요한 건 그저 오늘의 몫을 다 해내는 것.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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