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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부초(浮草)

2018-10-19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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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의 앵콜클래식] 부초(浮草)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 불편한 진실때문이다.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요 노움’ 하며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이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마냥 좋지만은 않은, 서로 다름에 대한 부담감, 서로 닮은 것에 대한 껄그러움이 공존하는, 아무튼 아버지의 존재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군대에서 탈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의 무용담처럼, 우리 가족사에 두고두고 내려오는 전설이 되어버렸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격하고, 어딘가 떠돌이 낭만을 간직한… 그러한 아버지를 나는 부초(浮草)라는 이름으로, 비록 회한이 앞서지만 그래도 이제는 자유롭게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대신하고자한다.

아버지의 자랑을 먼저 하자면, 선대 어른 이름 석자만 대면 종친회에서도 알아주던 ‘전주 李 씨’ 명문가(?)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늘 ‘李花’ 라고 하는 전주 이씨 뱃지를 가슴에 달고다니셨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동안 가장 좋아하셨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전주 이씨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다음으로 좋아하셨던 것이 바로 술(酒)이었다. 이름하여 약주. 술은 아버지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였는데, 아버지는 술자리에서 약주를 드시다가도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시던 분이었다. ‘어 이 양반 사라졌네’ 하면 아버지의 취기가 어느정도 올랐다는 뜻이었고, 아버지의 주도(酒道)는 거기까지였다. 술은 아버지에게 번뇌를 잊게 하는 벗이요, 詩 한 수를 대신하는 낭만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의 酒道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느날 안경을 깨먹은 형의 머리를 빵꾸내는 바람에 술은 오히려 (아버지의 바램과는 달리) 우리가족에겐 하나의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태어나 일본군 기마병으로 활약했기에 어딘가 사무라이적인 정신력… 무시무시함이 있었다. 성격도 급했고 분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칼 같았다. 우리가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정말 정체모를, 우리(세대)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었다.

얼마 전 CD와 흩어져있는 (영화) DVD 등을 정리하면서 문득 일본 영화 ‘부초(浮草)’를 발견하고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한 4, 5년 전쯤 됐을까,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Copy를 떠놓았던 영화였다. 일본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만든 1959년도 칼러판 리메이크였는데 가부끼 유랑극단의 단장 키하치란 자의 서먹한 부정(父情)을 그린, 쌍팔년도 서정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마치 유랑극단이라는 운명(체)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강한 애환이라도 표출하려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또 아버지의 역을 다하지 못하고 또다시 떠돌아야하는 장돌배기의 억지 낭만, 가부장제 속에서만이 존재할 수 있는 남성들의 자포자기 고백을 그린 영화이기도 했다.

가부키의 단장 카하치는 그의 단원들과 함께 오래 전 공연했던 마을로 다시 흘러들어와 그 곳에서 그의 옛 애인 오츠네와 그녀가 낳은 아들 신키치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카하치는 아들 신키치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삼촌행세를 하면서 모처럼 식구들끼리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되지만 극단소속의 내연녀 오타카에게 이 사실이 들통나면서 이야기는 다시 꼬이게 된다는 내용.

글의 결론부터 맺자면, 우리 형제는 아버지(세대?)에 대해 애증을 품고 성장했는데, 그것은 영화 ‘부초’의 카하치와 같은 아버지의 모습때문이었다. 우린 철들고나서 단 한번도 아버지에게 정다운 아들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친부를 잃은 슬픔보다는 한 인생이 가여워서 조금 슬펐을 뿐이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 살가운 아들이 되지 못한 이유를 우리는 단순히 반항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와 우리는 그만큼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결코 건강한 나무는 아니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만주 등에서 일본군으로 활약하다 해방을 맞으셨다. 아버지는 한국인이기에 앞서 뼈 속 깊이 일본인이었고 해방후에는 어설픈 한국인…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미국인 되어야했다.

아버지는 미국에 와서 오따기린가 일본 도자기 수입업체에서 일하시다 정년퇴직하셨다. 아버지의 표정은 무척 행복해 보이셨는데 그것은 돈을 많이 벌거나 세상적으로 출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은 아닌 듯 보였다. 오히려 전 일생을 흘러흘러 한 군데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돌았던 그의 삶이 결국 어느 한군데서 좌초되는, 그런 예감을 피할 수 있었던데 대한 안도감 때문인 것 같았다.

늘 한군데, 한 직장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만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와서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시대는 그 시대만의 격랑, 흘러가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제는, 늘 가슴 언저리에 언친듯 맴돌고만 있던 어느 부초의 환상을… 저 멀리 초원으로 보내 드려야할 때가 된 것 같아서이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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