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성적인 남자, 감성적인 여자?

2018-10-15 (월)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작게 크게
이성적인 남자, 감성적인 여자?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지난 6일 연방상원에서 브랫 캐버노 연방대법관 인준안이 통과됐다. 캐버노가 고등학교 대학교 재학시절 3명의 여성을 추행하거나 강간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피해 당사자인 크리스틴 포드 교수가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으나, 공화당 우위의 상원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0여 년 전의 사건을 두고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를 따지는 결론 없는 논쟁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청문회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도 캐버노의 청문회를 생중계로 시청했기 때문이다. 대법관 후보라고 나온 중년의 남자가 전국으로 중계되는 청문회에서 울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질문에 짜증을 내거나 언성을 높이며 대꾸를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기이하고 신기한 일이 많이 생기는 한국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후보자의 자질만 놓고 볼 때 캐버노는 부적격이라고 본다”고 당당히 소신을 밝히면서 공화당에서 유일하게 기권표를 던진 리사 머코우스키 상원의원은 그 광경을 지켜본 시청자들의 당혹감을 대변하는 것 같다. 1,000여 명의 법학대학 교수들도 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캐버노의 편파적이고 선동적인 답변 태도를 문제 삼으며 이례적으로 인준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다. 청문회를 지켜본 나는 캐버노가 성추행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냉정한 판단력을 요구하는 법관 자리에 굉장히 부적합한 인물이어서 인준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미국은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뉴스사이트나 SNS의 댓글창을 보니 그를 옹호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캐버노가 얼마나 억울하면 그렇게 울먹거리고 화를 냈겠냐면서 그의 울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캐버노의 울분에 공감하는 데서 더 나아가 갑자기 나타난 피해자들의 정치적 저의(?)를 의심하는 댓글도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청문회에서 차분하게 자기가 겪은 일을 고백한 박사학위 소지자 여성보다, 대노하며 울부짖는 남자 법관에게 더 공감과 신뢰를 표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아득해졌다.

하기야 남자의 감정표현에 더 관대하고, 화내는 남자에게 신뢰를 보내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예컨대 대중에게 사랑받는 수퍼스타급 운동선수들 중에도 경기장 안에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한 남자들이 꽤 있다. 이들은 화가 날 때는 상대선수를 과격한 반칙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심판 판정에 대놓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 운동선수들이 분노조절을 못한다고 큰 문제가 된 적은 없는 것 같다. 감정적인 행동이 곧잘 승부에 대한 열정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운동선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얼마 전 테니스 경기 중에 심판에게 다소 거세게 항의를 했던 세레나 윌리엄스는 가혹한 벌금과 공개적인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이성적인 남자와 감정적인 여자라는 전통적인 성별 스테레오타입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실상은 남자의 분노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분노’이고, 여성의 분노는 ‘감정조절에 실패한 비합리적인 분노’로 여기는 굉장히 오래된 문화가 있다. 캐버노 청문회에 대한 반응도 이런 경향에서 예외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물론 30여 년 전에 있었던 사실 여부도 알 수 없는 사건 때문에 인생 경력 전체가 망가지게 생긴 남자가 분노하는 게 뭐가 그리 이상한 일이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고위공직자가 중요한 인사청문회에서 캐버노 같이 감정조절에 실패한 모습을 보였다면 과연 그들에게도 너그럽게 다음 기회가 주어졌을까?

<김성준 콜로라도대 정치학 박사과정>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