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리의 비망록

2018-10-13 (토)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작게 크게
엊그제는 기분 좋은 의학 뉴스가 눈에 띄었다. 깜박깜박 기억을 못하는 증상은 치매로 가는 초기증상이 아니라 사실은 두뇌의 왕성한 지적활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거~봐, 내가 뭐랬어!’ 라며 어떤 이가 익살스런 댓글을 붙인걸 보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최근 가장 뜨거웠던 뉴스는 단연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인준청문회에서부터 임명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이 동네 실리콘밸리의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포드 교수가 캐버노 지명 직후, 30여년 전 성폭력 미수 사건을 민주당 상원의원에게 알리는 방법으로 폭로해서 정치적 오해를 받았다. 그가 당시의 심경을 담은 일기나 비망록을 제출했다면 분명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인준을 못 받았다면, 북핵문제 및 남지나해의 무인도에 활주로를 건설하는 등 무모한 팽창정책으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중국 다루기 등 산적한 과제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도력에 큰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1년 내내 수영장의 클로린에 시달린 물안경의 끈이 툭 끊어져 수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아침 사우나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도 짐짓 외면했지만, 낯익은 목소리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흑인친구 제리다. 독서하는 눈빛이 하도 날카로워 책을 뚫을 듯하다는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지식인이다.

미시시피 출신인 그는 60대 후반으로 명문 칼텍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 30여 년 간 스탠포드에서 지구물리학을 가르쳐 왔다. 약 5년 전 스탠포드 인근 소규모 YMCA에서 자주 만나 친해진 사람이다.

어떻게 지냈냐며 반갑게 화답하니 2~3년 내 은퇴를 준비하고 있단다. 은퇴 후 할 일을 정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귀를 쫑긋하며 물으니 회고록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억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하고 있단다. 메모하는 습관은 이렇게 세계적인 석학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인 그의 아들은 혼혈 한인여성과 사귀고 있다. 아버지는 아메리칸 인디언이고 엄마가 한인이다. 그런가 하면 박사과정의 한국인 제자가 이곳에서 한인여성을 만나고 한국에 가서 부모가 불참한 쓸쓸한 결혼식을 한 이야기도 해주는 등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한 것 같다.

다른 이들과 비교할 기회가 없어 잘은 모르지만, 나도 나름 메모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고 특기할 만한 부분이 떠오르면 제리 처럼 녹음까지는 아니어도 컴퓨터로 비망록에 기록을 하는데 그런 습관은 의심의 여지없이 삶의 여러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

한국인들이 해방된 후 73년이 지나도록 잊지 못하고 원한을 쌓고 있는 일본이 올해에도 또 한명의 노벨상(생리의학) 수상자를 배출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만 벌써 25명으로, 일본은 명실상부한 과학강국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여기엔 끊임없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일본인들의 집요함과 성실성,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서열, 철저한 기록정신 등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임에는 두말이 필요 없다. 시효가 한참 지났을 부정적인 민족감정 이젠 접어두고 이러한 진지한 자세는 우리 한국인들이 겸허히 배워야 할 모습이 아닐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노벨상 없어도 삼성전자가 소니를 이기고 지구촌 전자산업과 반도체 산업을 주름잡고 있다며 작은 성과에 자만하고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나라에 미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국 대한민국은 정치보복이나 ‘친일’ 타령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대신 부디 우수한 젊은이들이 기초과학에 청춘을 바쳐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데 국력을 집중했으면 좋겠다.

흙 수저 타령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실직 위험이 덜한 공무원이 되겠다며 고시촌으로 몰리는 기백 없는 자세를 보고도 위기를 못 느끼거나, 취직을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도움이 되는 백년지대계 일자리 대책보다 영혼 없는 푼돈 세금잔치와 립 서비스만 펼쳐서는 나라의 장래는 어둡다.

태평양 너머 나의 조국이 어려운 환경을 비관하지 않고 분투하면서 연애도 열심히 하는 멋진 젊은이들로 넘쳐난다는 희망찬 소리가 들려올 그날을 그려본다. 기성세대 우리 모두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다.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