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 판 대자보

2018-09-19 (수)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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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집권을 노린 박정희의 개헌(유신헌법)으로 나라가 뒤숭숭했던 1972년, 한국일보 영자지 코리아타임스에 작은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인 카피리더(원고 교열자)가 칼럼난에 “(박대통령보다) 인기가 더 좋은 육영수 영부인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라”는 조롱조의 칼럼을 썼다가 중앙정보부의 반동 언론인 리스트에 올라 한동안 미국 대사관에 은신했었다.

지난 5월 중국의 명문 베이징대 캠퍼스에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을 가능케 한 개헌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다즈바오’(대자보)가 등장했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 이후 29년 만에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독재정부의 언론탄압에 항거하는 육필 대자보들이 대학가를 풍미했고, 몇 년 전에도 고려대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시리즈 대자보가 눈길을 끌었었다.

지난주 미국에 색다른 대자보가 나타났다. 육필 벽보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비정상적 통치방식을 ‘까는’ 격문이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의 오피니언(독자투고)판에 게재됐다. 벼랑에서 떨어지는 미국(지도형상)을 4명의 남녀가 밧줄로 끌어당기는 모습의 컷을 곁들여 지난 11일자에 게재된 이 글은 즉각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코리아타임스의 칼럼과 달리 뉴욕타임스 대자보엔 기고가 이름이 없다. 글에 “나는 트럼프 행정부 내 저항그룹의 일원”이라는 제목을 달아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는 트럼프가 충동적 통치 스타일로 일관하며 도덕관념 없이 무모하게 행동한다고 비판하고는 하지만 그의 철부지 행동을 저지할 ‘어른들’이 백악관에 건재하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트럼프의 아슬아슬한 국정운영에 질린 각료들이 그를 실각시키기 위해 제 25 수정헌법을 원용하는 방안을 일찍이 밀의했지만 헌법위기를 자초하기보다 그의 경거망동을 ‘어른들’이 제지하는 편이 나은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했다.

제 25 수정헌법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 신속한 승계 절차를 규정한 내용으로 1967년 발효됐었다.

트럼프가 노발대발한 건 당연하다. ‘겁쟁이 반역자’인 익명 기고가를 즉각 색출하라고 법무부에 명령했다. 승계 1순위인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하지만 펜스를 비롯한 트럼프 행정부의 모든 어른들은 한결같이 “나는 아니야”라며 손사래를 쳤다. 트럼프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기고가의 이름을 공개하라고 타임스에 윽박질렀다.

트럼프가 계속 방방 뛰자 그의 최측근 참모 로저 스톤이 CNN과 인터뷰를 갖고 ‘백악관 어른들’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 얘기라며 “문제의 익명 대자보는 뉴욕타임스 자작극”이라고 덮어씌웠다. 곧이어 ‘여당언론’인 폭스계열의 인터넷 신문에 또 다른 익명 대자보가 떴다. 트럼프의 공적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대자보의 반향은 뉴욕타임스에 족탈불급이었다.

말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소동은 11월 중간선거를 겨냥한 쇼다. 뉴욕타임스 대자보가 트럼프를 때렸다기보다는 저항을 가장한 공화당 선거운동이라는 시각이 만만치 않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민)도 “글의 내용이 90%는 백악관의 미친 짓거리들을 옹호하고 나머지 10%도 우리가 견제할 터이니 걱정 말라는 투”라며 내부 저항과는 거리가 멀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트럼프와 공화당이 피해를 입을 건 자명하다. 트럼프를 폄훼한 이 대자보의 내용을 믿느냐는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5%가 그렇다고 했고, 28%가 아니라고 답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잘 수행한다는 응답자는 38%에 불과한 반면, 잘 못한다는 응답자는 과반인 54%에 달했다. 공화당 당원들의 경우는 84%가 ‘잘한다,’ 7%가 ‘못한다’ 였다.

나의 관심을 끈 항목은 따로 있었다. 전체 응답자의 51%가 이름을 숨긴 기고가를 나무랐고 39%는 옹호했다. 익명 칼럼을 게재한 뉴욕타임스를 비판하는 언론학자나 정통 언론인도 있다. 하지만 원칙에는 예외가 따른다. 뉴욕타임스가 익명 문제 때문에 이 대자보를 게재하지 않았다면 모든 독자들이 백악관 내부에서 쿠데타 시도가 있었음을 몰랐을 터이다.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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