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캐버노 인준전쟁의 의미

2018-09-06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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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사면할 절대적 권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갖고 있는가?”

“자기사면은 내가 분석해본 적이 없는 문제다…현직 판사로서, 대법관 지명자로서 내가 답변 할 수 없는 가상의 질문이다”

“현직 대통령을 소환에 응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가?”


“사법부 독립성의 문제로 나는 그 가상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지명자에 대한 연방상원 법사위의 인준 청문회 둘째 날인 어제, 캐버노는 집요하게 추궁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질문에 예상대로 ‘모범답안’을 반복하며 피해갔다.

가장 핫이슈인 낙태권에 대해서도 “여러 번 재확인된 중요한 판례”라고 강조했을 뿐 앞으로 그가 내릴 판결을 예측할 수 있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았다. 선배 대법관 지명자들이 양극화 청문회를 통과하며 배운 생존기술을, 그도 지난 몇 주 ‘모의 청문회 훈련’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생존기술은 이른바 ‘긴즈버그 룰’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현 대법관이 1993년 상원 인준 청문회 때 “불편부당한 판결을 서약한 판사는 어떤 예측도, 힌트도 제시할 수 없다. 향후 특정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무시하는 게 될 뿐 아니라 사법절차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구체적 사안에 대한 답변을 회피한 후 전수되어 온 모범답안이다.

그러나 유능한 법관인 캐버노는 워터게이트 스캔들 관련 녹음테이프 특검 제출을 명령한 1974년의 대법원 판결을 ‘가장 위대한 대법원 판결 중 하나’로 꼽으며 “아무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말로 자신을 지명한 트럼프 대통령과의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미친 도시’ 백악관의 혼란상을 폭로한 밥 우드워드의 신간 “두려움:백악관의 트럼프”가 워싱턴을 충격에 빠트린 와중에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치열한 공방전 뿐 아니라 진보진영이 결사수호를 천명한 낙태권, 총기규제와 환경보호, 대기업 이권과 근로자의 권리, 헬스케어와 민권 등 수많은 이슈에 대해 송곳질문과 모호한 답변이 반복될 청문회는 내일까지 진행된다.

민주당은 첫날 청문회 연기를 요구하면서 지적한 관련자료 은폐를 계속 문제 삼으며 캐버노를 공화당 정치에 깊숙이 발 담가 온 ‘당파적’ 보수파로 채색할 것이며, 공화당은 ‘탁월한 자질의 훌륭한 법관’으로 치켜세우며 대법원의 확실한 보수화를 가져다 줄 그를 적극 보호할 것이다.


청문회가 끝나면 법사위는 인준 여부를 상원 본회의에 회부할 것인지 표결한 후, 회부가 결정되면 지명 동의여부 안을 제출하면서 상원 본회의 표결에 회부한다.

캐버노는 돌발변수가 없는 한 인준될 것이다. 역사와 숫자가 캐버노 편이다. 미 역사상 인준을 부결당한 대법관 지명자는 12명에 불과하다. 50대49로 상원의 소수인 민주당이 캐버노를 13번째로 만들려면 완전단합한 후 공화당에서 최소한 두 표를 끌어와야 한다. 그런데 공화당에선 중도파까지 아무도 반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보수지역에서 재선에 출마한 자당의원 3명의 이탈 가능성이 민주당의 현실이다.

이런 무력함을 반영하듯 4일 청문회 자체를 연기시키려는 전략에 의한 민주당의 거센 반대와 시위대의 고성과 무더기 체포로 소란스럽게 시작된 청문회를 월스트릿 저널은 ‘캐버노 신파극’으로 폄하하며 질 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민주당의 ‘과장된 공격’을 캐버노를 길들이려는 ‘신고식’이라고 비난했다.

하긴 진보파 대법관 엘리나 케이건도 법대교수 시절 청문회가 지명자의 자질 검증과 진지한 법철학 파악은커녕 진부한 정치공방만 반복되는 ‘공허한 가면극’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왜 중요한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워싱턴은 워싱턴이어서 정치 촌극 한마당이 될 여지가 다분하지만 지명자의 자질과 인품을 검증하는 이 절차는 의원들이 그의 사법관에 대해 질문하고 미 국민이 이를 지켜볼 수 있는 기회다. 그리고 “크레딧카드를 사용하고, 물을 마시고, 일을 하는…모든 사람들은 대법원의 영향을 받는다”는 한 상원의원의 지적처럼 대법원은 보통사람의 일상과 직결되어 있다.

캐버노의 대법원 입성은 특히 그렇다. 많은 경우 대법관이 바뀌어도 보수파는 보수파로, 진보파는 진보파로 대체되어 대법원의 기본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캐버너는 좀 다르다. 그가 대체할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보다 훨씬 보수적이다. 중도보수 케네디가 스윙보터로 종종 진보 법관들 편에 서서 이념의 균형을 잡았던 대법원의 결정적 우향우를 의미한다.

캐버노는 노골적 거친 보수가 아니다. 보수진영이 사법부 보수화를 위해 1980년대 설립한 법률단체 ‘연방주의자 협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무브먼트에서 양성된 지성과 능력 갖춘 보수 인재의 한명이다. 이미 존 로버츠 대법원장 등 보수파 대법관 대부분이 이 협회와 유대를 갖고 있다. ‘캐버노 대법관’은 그저 보수파 1명 추가가 아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사법부 보수화 플랜의 이정표적 한 걸음을 상징한다.

인준전쟁에서 역부족인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민주당이 고군분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번 청문회를 유권자들에게 중간선거에 무엇이 달려있는가를 상기시키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공화당 천하가 계속될 경우의 대통령 월권과 낙태권 축소, 근로환경 악화 등 ‘위험’을 강조하며 민주 표밭에 투표참여의 필요성을 어필할 수 있어서다.

선거의 해 워싱턴의 9월은 언제나 너무 짧고 너무 바빠 정가의 행보가 급해지는 계절이다. 중간선거가 두 달이 채 안 남은 시점에서 대법관 인준 공청회까지 겹친 금년 워싱턴의 9월 첫 주가 숨 가쁘게 지나고 있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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