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8월의 저주’

2018-08-23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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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시인 T.S. 엘리엇의 명시 ‘황무지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되지만 미 대통령들에게 가장 잔인한 달은 8월로 꼽힌다. 워싱턴의 습한 날씨가 백악관의 난제들을 더욱 힘들게 해서일까, 끈적거리는 8월 복중에 위험에 빠져드는 경우가 흔했다.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사임한 것이 1974년 8월이었고, 빌 클린턴이 섹스스캔들로 연방대배심에서 증언해야 했던 것도 1998년 8월이었다. 조지 W. 부시의 집권 2기는 2005년 8월말 허리케인 카트리나 대응미숙으로 사실상 무너져 내렸으며, 중동에선 이라크와 우크라이나 사태가 불안에 빠진중에 미국인 저널리스트가 테러그룹 IS에 참수당하고 국내에선 퍼거슨 인종폭동이 발생하면서 버락 오바마의 지지율이 최저로 하락한 것도 2014년 8월이었다.

‘8월의 저주’는 ‘예외적 대통령’으로 간주되는 도널드 트럼프에게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2018년 8월21일 두 곳의 연방법정에서 ‘동시에 날아든 원투 펀치’가 트럼프를 위기로 몰고있다. 금융사기·탈세·선거자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그의 전 개인변호사 마이클 코언이 감형을 받기 위해 플리바게닝을 선택해 유죄를 인정했고, 2016년 대선의 선대본부장이었던 폴 매너포트가 금융사기와 탈세 등 8개 혐의에 대해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을 받았다.

트럼프의 최측근 고위 참모였던 두 명이 한꺼번에 범법자로 추락한 것이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기꾼들’이라는 뉴욕타임스의 사설 제목이 트럼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시사한다. 닉슨의 워터게이트를 다룬 영화 제목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따온 제목이다.

조짐은 이미 지난주부터 심상치 않았다. 수요일, 트럼프는 러시아 사태와 관련해 자신을 강력 비판해온 존 브레넌 전 CIA국장의 기밀취급권을 박탈해 미 정보계 안팎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토요일엔 돈 맥간 백악관 법률고문이 자발적으로 특검 조사에 응해 30시간의 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뉴욕타임스에 보도되었다. 일요일엔 트럼프가 위증의 덫에 빠질까봐 특검의 대면조사를 반대한다는 대통령 변호인 루돌프 줄리아니가 그 근거로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란 궤변을 늘어놓았으며 같은 날 코언이 금융사기 등 혐의로 곧 기소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자신을 향해 점점 조여드는 법적 수사망에 대한 트럼프의 불안은 주말 동안 몰아친 트윗 폭풍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맥간의 진술내용이 자신에게 자세히 보고되지 않은 것에 분노한 대통령은 특검수사를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반공산주의 광풍 ‘매카시즘’에 비유하며 ‘국가적 수치’ ‘성난 민주당 폭력배들’ ‘마녀사냥’ 등 극단적 표현을 동원해 비판을 퍼부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이 폭풍 트윗이나 브레넌 등 정적에 대한 ‘보복’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현실은 트럼프에게도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21일 오후 미국민들 앞엔 240마일 떨어진 뉴욕과 버지니아의 두 연방법원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된 법정드라마가 분할화면으로 펼쳐졌다. 오후 2시30분 뉴욕 법정에서 코언의 유죄인정이 나왔고 잠시 후 버지니아 법정의 배심원단은 나흘간의 심의 끝에 매너포트에게 18개 혐의 중 8개에 대한 유죄평결을 내렸다.

특검 ‘1호 기소’인 매너포트 유죄평결은 뮬러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특검팀의 승리로 평가되지만 백악관에 더욱 불길하게 다가오는 것은 코언의 플리바게닝이다. 트럼프의 연방법 위반을 직접 시사하고 있어서다. ‘대선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해’, 트럼프의 성 추문 확산을 막는 ‘입막음 용’ 돈을 두 여성들에게 주었다는 선거자금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면서 트럼프의 ‘지시’에 따라서였다고 말한 것이다.


트럼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총알받이가 되겠다던 ‘충복’이 트럼프를 겨냥하는 ‘저격수’로 돌아선 것이다. 자신을 배신 안 한 매너포트 ‘유죄’와는 거리두기가 (최고 80년형에 직면한 그가 감형을 위해 특검 협조로 변심하지 않는 한) 가능해도, 배신한 코언과의 거리두기는 쉽지 않다는 게 트럼프의 당면 문제다. 트럼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코언은 이미 대통령의 사면도 원치 않는다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특검과 기꺼이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마녀사냥’ 비난 계속으로 반격하고 지지표밭 선거유세 열기로 화두를 돌리며 특유의 탁월한 생존 능력을 발휘하려 하지만 이번엔 별로 여의치 않아 보인다.

법적·정치적 위기에 처했는데 갖고 있는 옵션도 신통치 않다. ‘사기꾼 참모들’에 대한 사면권을 행사할 경우 뜨거운 헌법논쟁을 야기할 것이며, 뮬러 특검을 해임해 수사 자체를 좌절시킬 경우 다시 사법방해의 덫에 걸릴 수도 있고 공화당 의회까지 등 돌려 완전 사면초가에 빠질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은 기소하지 않는다”는 법무부 방침에 따라 위법행위가 밝혀진다 해도 뮬러가 트럼프를 기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위협은 피해갈 수 없다. 대통령의 운명이 의회에 달렸다는 뜻이다.

트럼프의 영향력에 거의 굴복상태였던 공화당은 중간선거 피해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아직은 말을 아끼며 관망 중이다. 코언 이슈에 대한 의회조사와 연방대법관 인준 청문회 연기를 촉구하며 ‘점증하는 법치 위기’를 경고하는 민주당도 중간선거 역풍을 우려해 ‘탄핵’ 거론엔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서 상당히 신중하다. 그러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 주도권을 탈환할 경우, 탄핵 추진이 급물살을 탈 것은 틀림없다.

그때까지 양당 모두 ‘트럼프 사태’의 터닝포인트로 기대하는 것이 뮬러 특검의 수사종결 보고서다. 그러나 언제, 어떤 내용을 공개할 것인지에 대해선 가뜩이나 입 무거운 뮬러가 철저한 함구령까지 내려놓아 지금으로선 누구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8월의 저주’는 이처럼 풀리지 않은 채 닉슨과 클린턴을 악몽으로 몰아갔던 탄핵의 먹구름이 트럼프 백악관을 짓누르고 있는 2018년의 여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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