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빨간 신호 앞에서

2018-07-28 (토) 김영수 수필가
작게 크게
신호등이 빨간 색으로 바뀐다. 브레이크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동안 잠시 긴장을 풀어 본다. 멈추어 서니 여유가 생겨서인지 가시거리가 연장되고 시야의 각도가 확대되는 느낌이다. 우연히 시선을 준 앞 차의 사이드미러에 운전자 얼굴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뭔가를 먹고 있는가 보다. 턱 근육이 부산스레 움직이며 얼굴 아랫부분이 요란스럽다. 요즘은 텔레비전 ‘먹방(먹는 방송)’이 대세인데 빨리, 크게, 많이 먹을수록 먹음직스럽다는 시청자의 선입견을 충족시키려고 고심한다고 한다. 앞 차의 운전자도 서있는 틈을 타 바삐 먹으려니 먹방을 찍듯 먹을 수밖에 없으리라. 갈 길이 먼 사람들에게는 빨간 불이 장애가 될지 몰라도, 그 잠깐의 멈춤 덕분에 누군가는 허기를 달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혼자 운전할 때 가끔 노래를 부른다. 나만의 오붓한 공간에서 아무도 의식할 필요 없다는 편안함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그 동안 내가 자유라 여기며 노래하던 시간과 공간이 다른 이들에게 노출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순간, 생각의 비누방울이 터지면서 몸이 달린다. 초록 불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운전도 삶도 달림과 멈춤으로 균형을 잡으면 쉬이 지치지 않는다. 몸이 아플 때도, 정신이 고통스러울 때도, 잘 하고 있던 일이 엉키어 풀어가기 어려울 때도 우리는 빨간 불, STOP을 경험한다. 쉽지 않은 세상에서 사방이 STOP 표지로 막힌 듯한 막막함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살면서 멈출 수밖에 없던 순간들은 아마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였을 것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글이나 악보에도 쉼표가 있듯이, 우리 삶 속에서도 이것을 잘만 활용하면 완급을 조절하는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운전 길에서도 인생길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것이나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아름다움은 멈추어 섰을 때 비로소 눈에 띈다. 쉼 속의 기다림을 통해 멀리 보고 넓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STOP 표지판 앞에서 차를 세운다. 건성으로 멈추는 게 아니라 좌우 양쪽을 확인하며 온전히 섰다가 출발하라는 신호이다. 멈추어 서면 보다 폭넓은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대각선 쪽의 차 번호판에 눈길이 머문다. ‘IN HURRY’. 멈춤 신호 앞에서 잠시 숨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HURRY’라는 단어가 재촉을 하는 느낌이다. 무슨 의미로 저런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지 몰라도 차 주인은 아마 젊은이일 것 같다. 인생의 내리막길에 들어선 나이에도 설마 HURRY를 외칠까 싶어서다.

지나는 차량의 번호판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건 캐나다에 살면서부터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차나 똑같이 아라비아 숫자뿐인데 이곳에서는 가끔 재미있거나 나름의 의미를 지닌 영문 번호판을 만나기도 한다. 이름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던 우리네는 작명에 큰 비중을 두어왔다. 장수를 비는 이름과 아들을 바라는 이름이 많았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만일 차번호에 한글이 허용된다면 그 역시 단순한 재미보다는 길운이나 기복의 의미를 지닌 글자의 조합이 등장하지 않으려나 싶다.

초록 불에는 쉼이나 멈춤의 의미는 없다. 초록빛 전진 명령을 받은 차들은 일제히 출발하여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이라도 하듯 괴성을 지르며 달린다. 하이웨이에 들어섰으니 이제부터는 멈춤이 거의 없는 질주가 이어지리라. 현대 문명 속의 삶이란 질주의 연속이라더니, 쉼 없는 속도경쟁 대열에 합류한 기분이다.

말을 타고 달리던 인디언이 멈춰 서서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을 기억한다. 멈추어 쉬는 동안 자신이 어디를 향하는지 방향을 가늠하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며 성찰하는 시간도 가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차를 타고 질주하는 우리도 가끔은 멈추어 서서 자신의 참모습을 들여다보고, 또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루를 살던 태양이 사이드미러에 여유 있는 걸음으로 들어온다. 해가 자세를 낮출수록 붉은 빛을 더해갈 것이다. 노을이 주는 푸근함과 평온함에 기대어 본다. 빨간 불 앞에서 잠시 쉬어가는 우리처럼, 지는 해가 붉게 물드는 것은 지친 몸을 뉘어 쉬라는 신호가 아닐까. 비록 휴식이 오늘의 삶을 유보한 자의 궁색한 대안이라 하더라도, 나는 붉게 물든 노을의 편안함 속에 쉬어 가리라.

<김영수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