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엉망진창의 삶

2018-07-09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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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의 삶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엄지를 톡톡. 화면 안의 아이콘을 생각 없이 누른다. 이 친구는 졸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정장을 쫙 빼입고 있네. 현수막이… 어… 대기업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이구나. 이제 돈도 많이 벌겠구나, 부럽다.

엄지를 또 다시 톡톡 놀려 본다. 어머. 얘는 결혼하는구나. 요즘은 스튜디오 사진을 저렇게 찍나? 어색해 보이긴 하지만 부럽네. 이제 이 친구도 가는구나. 또 톡톡. 맞다, 이 친구는 휴가 중이었지. 칵테일 사진이네. 피나콜라다구나. 저 파인애플 데코레이션 좀 봐. 저기가 어디라고 했지? 세부라고 했나, 몰디브, 푸켓, 보라카이었나… 내게는 달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휴양지 이름들. 여기저기서 보고 들었던 휴양지 이름을 되짚어 본다.

어차피 못 가는 건 똑같은데 달이나 세부나 무엇이 다를까. 씁쓸함이 올라온다. 액정필름에 지저분하게 남은 지문을 이불로 눌러 닦는다. 지문은 사라졌는데도 씁쓸함은 그대로다.


새벽 한시가 좀 넘은 시각. 자야 하는데 스마트폰을 놓기가 어렵다.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엄지를 슥슥 내려 새로운 글을 훑어본다. 액정이 나인가 내가 액정인가 싶을 때가 되어서야 스마트폰을 놓는다. 눈을 감기는 했는데, 분명히 눈을 감고 잠이 들었던 건 맞는데, 중고시장에서 4달러 주고 산 알람시계가 시끄럽게 울린다. 아. 살려줘. 벌써 아침이다.

남은 제육볶음에 찬밥과 김, 참기름을 넣어 휘휘 볶아 먹고 집을 나선다. 빈속에 매운 걸 먹어서 속이 쓰리다. 찜통 같이 더운 길을 걸어서 출근한다. 아뿔싸, 공사 중이다. 이 더운 날씨에 한 블록 돌아가라니.

땀을 뻘뻘 흘리며 출근하고 나서 디렉터와 하릴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어제 준비해 둔 학습지를 쭉 뽑는다. 짜 두었던 교안을 훑어보면서 메모를 한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아주다가 시간이 너무 가버렸다. 준비해온 학습활동은 다음 수업에 하기로 한다. 과제를 다시 공지했더니 불만 가득한 눈빛이 돌아온다.

다시 찌는 듯한 더위 속을 지나서 책상에 앉는다. 읽어야 할 논문, 써야 할 글이 산더미다. 노트북을 켜 놓고 또 하릴없이 소셜미디어를 맴돈다. 아직 하기 싫어. 조금만 더. 오늘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날.

이렇게 일한다 해도 월급통장에 찍힌 액수는 대기업 친구가 받는 액수의 절반이나 되려나. 내 상황에 결혼이라니,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교내 수영장 등록비 걱정하는 처지에 해외 휴양지 휴가라니 언감생심이네. 엉망진창인 날, 엉망진창인 나.

어디를 가든지 자존감을 가지라고, 노력하라고, 꿈을 이루라고 한다. 글쎄, 누군가는 나를 보고 “자존감을 갖고 노력해서 꿈을 이뤘다”고 할 거다. 스무 살의 나는 미국 박사과정을 밟고 싶었고 지금 밟고 있으니까 꿈을 이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나를 보고 엉망진창인 삶이라고 할 거다. 스무 살 때도, 지금도, 나는 매일 매일이 엉망진창이었는걸.

4달러짜리 알람시계를 노려보는 삶, 아침을 잘못 먹고 쓰린 속을 부여잡고 출근하는 삶, 해야 할 일을 미뤄두고 인터넷을 서성거리는 삶. 말 그대로 엉망진창.

자존감을 갖고 노력해서 꿈을 이뤄내는 삶도, 엉망진창인 나날을 살아내는 삶도, 동전의 양면마냥 똑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엉망진창인 삶을 살아내는 용기 아닐까. 엉망진창인 삶에도 한두번쯤 빛나는 순간은 찾아오겠지. 신입사원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해외 휴양지에 가는 것 같은. 빛나는 순간이 찾아오면 또 그대로 누리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러니 다른 사람의 빛나는 순간을 질투하고 부러워할 이유도 없을 테다.

엉망진창인 삶을 있는 그대로 지속해 나가는 용기, 찾아오는 빛을 누리는 마음. 이렇게 두 가지만 기억하자.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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